故 조지 마이클, LGBT 인권 위해 싸웠다
최근 53세를 일기로 타계한 영국의 팝스타 조지 마이클은 LGBT(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전환자) 인권 운동의 기수였다. 고인은 생전에 “게이의 삶에 문제는 없었다”고 말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전 세계 팬들과 동료 스타, 그리고 비평가들이 “조지 마이클은 빛나는 팝스타 경력과 유명한 게이 인권운동가로서의 업적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며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심장마비로 숨진 그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솔로곡 가운데 일부에서 자신의 성적 취향을 표출하면서 LGBT 인권을 열렬히 지지했다. 조지 마이클은 미국 비밀경찰 앞에서 음란행위를 한 혐의로 1998년 4월 베벌리 힐스에서 체포된 뒤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했다. 당시 그는 벌금 500파운드(약 74만 원)와 80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선고받았다. 영국 일간 ‘더 선’은 ‘당신이 가기 전에 지퍼를 올려주오’(Zip Me Up Before You Go Go)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보도하기도 했다.
고인은 훗날 “게이로 살면서 도덕적 문제를 일으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 여자와 여러 번 사랑에 빠졌고, 그 뒤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으나 그런 게 사랑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다. 마이클은 2007년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적 취향을 비밀로 유지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엄마가 아직 살아 계셨는데, 성적 취향을 털어놓았다면 내가 당할 일을 생각하면서 날마다 악몽을 꾸셨을 겁니다. 사실, 19세 때부터 사람들에게 동성애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시작했어요. 만약 내가 일찍 커밍아웃했다면 현재와 같은 가수경력을 쌓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더 행복했을지는 모르겠군요.”
마이클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동성애 파트너였던 디자이너 안젤모 펠레파를 1993년 에이즈 관련 질병으로 잃은 뒤, 20대 후반을 매우 우울하게 보냈다고 고백했다.
“내 성적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27세 때 처음으로 성관계를 맺었죠.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동성애 파트너를 잃은 뒤엔 3년 동안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 뒤 어머니를 잃었는데, 마치 저주받은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어요.”
고인은 자신이 커밍아웃한 해에, 세계에이즈의 날에 맞춘 HIV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의 제작에 앞장섰다. 다큐멘터리 영화 ‘살아있는 동안’(Staying Alive)은 여러 나라 출신의 HIV 감염자 또는 환자인 젊은이 6명이 겪는 일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조지 마이클은 HIV 자선단체 ‘테런스 히긴스 트러스트’(Terrence Higgins Trust)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LGBT 자선단체 스톤월(Stonewall)은 트위터 계정을 통해 다음과 같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편히 잠드소서 (R.I.P, Rest In Peace). 당신은 숱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고, 당신의 음악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겁니다. 당신을 깊이 애도합니다”
이 밖에 LGBT 인권운동가, 동료 가수, 유력지 칼럼니스트 등 숱한 사람들의 애도 물결이 소셜미디어에 끊임없이 이어졌다.
김영섭 기자 edwd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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