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여왕 시대
성학으로 보는 우리나라 출산율 - ⑫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1837년부터 1901년까지 영국을 다스렸다. 이미 입헌군주국이 되어 전 같지는 않았지만, 남편인 앨버트의 도움으로 왕권을 확립하고 영국을 세계 최강의 국가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녀 9명을 출산하고 39세에 과부가 된다. 그 후 계속 독신으로 지났는데, 많은 영국 여성들이 미안한 마음에서였는지 자신들의 오르가슴을 불경하다고 느끼기까지 했다고 한다.
첫날 밤 어떻게 해야 할지 불안해하는 신부에게 어머니의 가르침은 이랬다고 한다. ‘남편이 하자는 대로 바로 눕기는 해라. 하지만 오직 대영제국만 생각해라.’
여자는 복사뼈가 안 보이는 긴 정장을 하고 다녀야 했고, 유방은 완전히 가려야 했다. 유방(breast)이란 말 대신 가슴(bosom)이라 불렀고, 심지어 닭고기의 가슴살도 흰 고기(white meat)라 불러야 했다. 식탁의 테이블보는 적어도 아래로 20인치는 내려와야 하고 도서관의 책도 남자 저자와 여자 저자의 책을 나란히 못 놓았다. 또 동물에도 옷 입히게 했는데, 가난한 농부가 자기 입을 옷도 없는데 소의 아랫도리를 가려야 하는 지경이라는 얘기까지 있었다.
소위 ‘빅토리아 시대’는 보수적 성의 극치기처럼 알려지고 있지만 그녀의 정책은 완전한 도덕주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자신이 82세에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죽은 남편의 내복과 외출복을 직접 챙기어 그의 방에 놔두곤 했다. 시종이었던 존 브라운과의 염문도 있었지만 확실치 않다. 때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남자들이 바다로 나가 생긴 과잉여성 인구 시대였다. 창녀들이 넘쳐났지만 1880년대 성병의 만연이 큰 사회문제가 될 때까지 이들을 단속하지도 않았다. 이때가 영국 역사상 창녀가 가장 많았던 시대로 어른 남자 12명에 창녀 한 명꼴이었다는 설까지 있다. 그래도 가정 주부들은 정숙한 아내로 살면서 육아에 힘썼다.
굳이 이 ‘빅토리아 시대’를 얘기하는 이유는, 결코 그때가 좋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그 시대의 임신율, 출산율, 인구증가율이 역사상 최고를 이뤘기 때문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혹시 배울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1851년 1천 6백만이던 영국과 웨일스의 인구가 1900년에는 3천만을 넘었다. 이 기간에 미국이나 호주로 떠난 인구가 1천 5백만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같은 시기 옆의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의 인구는 8백 20만에서 4백 50만으로 줄었다. 기근 때문에 많은 인구가 미국으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이 두 나라를 비교해 보면 열린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김원회 칼럼 - 성학으로 보는 우리나라 출산율>
① 출산율에 대한 오진
② 출산율과 사랑의 변질
③ 출산율과 성태도
④ 처음 접한 '문화영화'
⑤ 무서운 포르노
⑥ 포르노와 자본주의
⑦ 포르노 배우와 창녀
⑧ 로스앤젤레스의 도우미
⑨ 성사(性史)
⑩ 성평등
⓬ 빅토리아 여왕 시대
다. 그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황후 알렉산드라의 후원으로 실권을 얻었고, 1915년 왕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폭정을 일삼지만 이듬해 암살된다.
그의 매우 큰 페니스는 귀족들의 질투의 대상이었는데, 사후에 잘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