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접한 '문화영화'

성학으로 보는 우리나라 출산율 - ④

지금은 없어진 동숭동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정.


내가 포르노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서울 문리대 의예과 2학년 때였던 1957년 봄이었다. 같은 과 친구가 ‘문화영화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게 뭔데?’ ‘좋은 거.’ 간다고 했더니 1,000환을 내라고 했다. 1962년 화폐개혁 후의, 그러니까 지금의 100원이었지만 당시는 개봉영화 값보다 비싼 거였다. 을지로 6가 네거리 근처, 후에 국립의료원이 들어선 자리는 아직도 전쟁의 폐허 그대로였는데 거기에 큰 창고 같은 것이 있었고, 우리들은 그날 저녁 그리로 갔다. 그리곤 백여 명의 대학생들이 거적 같은 것들이 깔려 있는 바닥에 앉아 이 소위 ‘문화영화’를 봤다. 


16밀리 필름으로 돌아가는 흑백영화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히 앉아서 봤고 조용히 나왔다. 할 말을 잃었는지 친한 친구들끼리도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던 기억이다. 멋모르고 온 듯한 여학생도 한명 있었는데, 모두 의식적으로 그녀를 외면해주면서 밖으로 나왔다. 

한 마디로 쇼크였다. 그렇다고 그저 화장실에 들어가 급하게 자위(그때는 ‘핸드 플레이’라고 불렀다)나 하고 나오는 게 성표현의 다였던 우리들에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쩌다 여학생과 데이트를 해도 손목 한번 제대로 못 잡아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때 본 영상들은 그 후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었다. 성교육이라고는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우리들에게 그건 교육이었고 기실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릇된 지식도 많이 얻었고 그건 내가 성학을 공부하면서 진실을 알게 될 때까지 마음 한 군데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두들 기가 죽어 있는 것 같았다. 남들보다 뛰어난 육체를 가져야 포르노 배우들이 되었을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마약을 비롯한 숱한 약물들을 쓰고 그 내용이 수없이 편집되어 만들어진 건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대학과 군복무 마치고 미국으로 떠났던 1965년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영화를 더 볼 기회가 없었다. 솔직히 보고 싶을 때도 있었다. 1953년에 휴전이 되었으니 어쩌면 그건 전쟁 중 미군들이 보던 것이 흘러나온 거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산부인과 수련을 마치고 1970년 돌아왔을 때는 집안에 8밀리 영사기와 이미 컬러로 된 포르노 필름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어떻게 단 5년 사이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달라졌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김원회 칼럼 - 성학으로 보는 우리나라 출산율>

① 출산율에 대한 오진
② 출산율과 사랑의 변질
③ 출산율과 성태도

❹ 처음 접한 '문화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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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file

    부산의대 정년퇴임 후 서울여대 치료전문대학원 객원교수로 10년간 ‘성학’을 강의했다. 아태폐경학회연합회(APMF), 한국성문화회, 대한성학회 등의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국제심신산부인과학회(ISPOG) 집행위원, 대한폐경학회 회장, 대한심신산부인과학회 회장 및 세계성학회(WAS) 국제학술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단기고사는 말한다>, <사춘기의 성>, <성학>, <섹스카운슬링 포 레이디>, <시니어를 위한 Good Sex 오디세이> 등 다수의 저작이 있다.
댓글
  • 흥미롭네요. 50년대 후반이면 미국에서도 포르노가 보편화되지 않았을 거 같은데...국내에서 보셨다니...역시 깨어있으신 분이시네요!
  • 아닙니다. 포르노 영화는 일반영화와 역사를 같이 합니다. 특히 유럽과 미국에서는 1930년대부터 크게 보급되었지요. 인터넷에서 'vintage porno....' 등으로 검색하면 나올 겁니다. 김원회 답글
    • 와 교수님이 직접 댓글을 달아주신 건가요?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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