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뒤흔든 최고의 요녀는?
17세기 프랑스의 지성이었던 블레즈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살아 있을 때 옥타비아누스로부터 ‘로마를 짓밟는 이집트 여인’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미모로 남성들을 유혹하려던 요녀(妖女)이기 이전에 나라를 보전하기 위하여 로마 제국을 이용하려 한 여걸(女傑)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동서를 막론하고 여자의 미모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던 경우는 여러 번 있었다. 이웃나라 중국의 역사에도 이른바 '나라를 기울게 한다'는 뜻의 경국지색(傾國之色)이 많이 등장한다.
고대왕조였던 하(夏)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걸은 일찍이 산동지방의 한 제후인 유시를 정벌하여 항복을 받고 많은 진상품을 갖고 돌아온다. 그중에는 매희라는 아리따운 여인도 있었는데, 그녀가 걸 왕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다.
(네가 나의 조국을 짓밟고 나의 가족들을 무참히 죽였거늘, 내 네 간이라도 꺼내어 씹고 싶거늘, 어디 두고 보자. 결코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싶지도 않거늘, 매일 밤 네 앞에 알몸이 되어주는 것은 오로지 그 날을 위해서, 그 날을 위해서….)
“마마, 천하를 호령하시는 마마께오서 어떻게 이렇게 초라한 궁에서 사십니까? 새로 훌륭한 궁전을 지으셔서 천하에 그 위엄을 보이시옵소서.”
걸은 더 웅장한 궁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부역에 동원되어 채찍질당하고 손발이 잘리고 코도 잘렸다. 매희는 비단 째지는 소리가 듣기 좋다하여 수천 필의 비단을 궁에서 찢게 하였고, 약 3000명의 남자 목을 베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역사가들은 이를 매희의 미모와 뛰어난 방사 기법 때문이었다고 하고 있다. 시쳇말로 속궁합이 맞았던 모양이다.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주에게는 달기라는 악녀가 있었다. 달기의 방에는 음란한 그림들로 가득한 병풍이 있었다는데, 이는 동양춘화의 최초 기록이기도 하다.
달기는 주왕을 부추겨 사람들에게 잔인한 형벌을 가하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데,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들로 하여금 그 위를 걷게 하여 미끄러져서 타 죽게 하거나, 죄수들을 가둔 구덩이에 독사와 전갈을 집어넣어 그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즐겼다고 한다. 또 달기는 주왕에게 자신의 심장병이 나으려면 비간이라는 충신의 심장을 먹어야 한다면서 그를 죽이게 하기도 했다.
사자성어로 ‘술이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처럼 쌓여있다’는 뜻의 '주지육림'도 그녀의 작품이라는 설이 강하다.
“마마, 이렇게 지루하게 술 따르며 돌아갈게 뭐 있사옵니까? 술로 연못을 만들면 아무 때나 쉽게 떠 마실 수가 있지 않사옵니까?”
이리하여 술이 못을 이루고 나뭇가지에 고기가 걸리게 되었다. 매일 밤 그 못 둘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젊은 남녀들이 음악에 맞추어 광란의 춤을 추면 달기는 주왕의 가슴에 안겨 음탕한 미소를 짓곤 했다고 한다.
결국 매희와 달기는 요즈음 식으로 쿠데타를 불러, 나라도 망치고 자신도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어 등장한 주(周)나라 때는 포사라는 여인이 있었다. 유왕의 총애를 받아 아들을 낳기도 했지만 그녀는 한 번도 웃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왕은 그녀를 웃기려고 온갖 꾀를 생각하다가 외적의 침입도 없는데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모았다. 그녀가 불보기를 좋아했다는 설도 있다. 공연히 달려온 제후들을 보고 포사는 비로소 웃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뒤 실제로 북쪽의 오랑캐인 융족이 쳐들어 왔을 때는 봉화를 보고도 아무도 오지 않아 왕은 죽임을 당하고 포사는 납치가 되는 동양판 '늑대와 양치기 소년'의 주인공들이 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중국왕조의 제일 유명한 스캔들은 현종과 양귀비의 얘기가 아닐까 한다.
구름 같은 머리 가락, 꽃다운 얼굴, 거기에 황금 비녀,
연꽃 휘장 속에서 지새운 따사로운 어느 봄밤,
그러나 봄은 밤이 너무 짧아 벌써 해가 높이 솟았구나.
허지만 이를 어쩌랴. 이제 황제는 조회에도 안 나오네.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 중의 한 대목이다.
측천무후의 손자이기도 한 당(唐)의 현종은 ‘개원의 치’를 이룩한 명군이었지만 50이 넘어 씻지 못할 큰 실수를 저지른다. 자신의 아들 30명 중 18번째인 수왕과 6년을 같이 산 며느리인 양옥환을 자신의 여인으로 삼은 것이다.
우선 그녀를 화산의 도사로 출가시켜 아들인 수왕에게서 빼내고, 다시 궁 안의 도교사원을 관리하게 하는 등의 치밀한 순서를 거치기도 했다. 양귀비의 나이 22세, 현종은 57세였는데, 이때부터 당나라는 서서히 끝자락을 달리게 된다. 양귀비의 세 오빠는 모두 높은 벼슬을 받았고, 세 명의 언니들은 국부인이라 불리었다. 사촌 오빠인 양소는 '국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승상의 지위에까지 올라 국정을 전횡하였다.
양귀비가 동양 최고의 미인이었다고는 하지만 비교적 짧은 팔 다리에 75㎏의 뚱뚱한 체구와 60㎝가 넘는 길고 검은 머리를 가졌었다는 것 외에 체형에 대하여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현종이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정사를 내팽겨 치고 사흘 낮 밤을 나올 줄 모른 것은 틀림없이 그녀의 특별한 방중술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어왔다.
그래선지 요즈음 성교 중에 더 강한 자극을 받도록 질(膣) 전벽의 방광과 요도가 만나는 부위 근처인 소위 G-Spot을 약간 도드라지게 만드는 것을 ‘양귀비 수술’이라 부르기까지 한다. 술기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자가 지방이식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효과가 검증된 수술은 아니다.
어느 날 변방을 지키던 절도사로 현종의 양자를 자처하던 안록산은 궁에서 양귀비를 보게 되고 열네 살이나 연하인 그녀를 처음엔 ‘어머니’라 부르지만 그 호칭은 얼마 뒤 ‘여보’로 바뀌게 된다. 양귀비도 그의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좋아했다고 하며, 가끔 화청지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켜주곤 했는데, 어느 날 체중 200㎏의 안록산이 그녀를 안고 몸으로 비비다가 유방에 상처를 냈고 양귀비는 이를 감추기 위하여 붉은 비단 천으로 젖가슴을 감추었는데, 이것이 ‘브래지어’의 시초라는 설도 있다.
결국 그들의 애정행각이 '안록산의 난'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현종은 수도 장안을 버리고 지금의 쓰촨성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양귀비, 양국충 등도 동행을 했다. 하지만 도중에 병사들이 양국충을 살해하고 왕에게 ‘난리의 근본’인 양귀비를 죽일 것을 요구했다. 현종은 ‘귀비는 궁에만 있었고, 국충의 죄와는 관계가 없다’고 감쌌지만, 이미 레임덕에 허덕이던 터라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양귀비를 나무에 목매어 자결하도록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나이 3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