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 담론의 자유, 100년 전보다 퇴보?

일본강점기에도 동성애, 누드 등에 관용

(사진=픽셀스)


지금의 우리나라 성 억압정책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학교도, 온라인도 세계적으로 이슬람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 외에 유일하게 성에 대해서 규제일변도다.

 

어릴 적부터 성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배운 사람들이 인터넷을 점령하고 있어 성의 즐거움, 본능적 욕구를 얘기하면 비난 받기 십상이다. 외국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적 유머를 했다가는 성희롱의 덫에 걸리기 십상이고, 옷깃만 잘못 스쳐도 성폭력 걱정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100년 전보다 성적 담론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퇴보한 것이 아닐까?

 

가부장제의 엄격한 가정에서 부모와 대화가 잘 안 되던 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고교) 쯤의 여학생들이 학교에서 ‘말이 통하는’ 동무를 만나면서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 성학적인 의미는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솟아올랐을 것이다. 그리곤 자기들이 동성애를 한다고 믿기까지 했다. 실제 여자 동성애자는 매우 드물어 남자에서의 빈도 4%의 반에도 훨씬 못 미친다.

 

하지만 이들 여학생은 ‘없을 때는 보고 싶고, 맛있는 게 있으면 갖다 주고 싶고, 학교에 가서 그 애를 만나볼 생각을 하면 기뻤다’고 하니, 가히 그 감정은 거의 사랑이었다. 남녀 사이의 연애도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으며, 나이 차가 많거나 또는 노골적으로 연애한다고 말하기가 거북할 때는 서로 S 오빠, S 누이, 또는 S 동생 하면서 만나기도 했다.

 

아직도 동성애자들의 소위 ‘커밍아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1930년대에는 여학생들이 대수롭지 않게 뭔지도 모르면서 자기에게 동성 연애하는 학생이 있다고 말 하곤 했다.

 

이들은 서로 껴안기도 하고 어루만지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때로는 실에 먹물을 칠하고 바늘로 팔뚝부위 같은 데에 문신(文身)을 하면서 평생 잊지 말자고 맹세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마 일본문화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동성결혼식도 있었다.

 

동성애를 묘사한 글과 그림. 1937년도 '여성' 6월호 내용이다.


1932년 6월 ‘여인’ 창간호에는 남편의 무관심과 이혼으로 오랫동안 독수공방한 두 여인이 연애 끝에 정식으로 결혼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동성(同性)의 신랑 신부의 결혼식에서 생긴 넌센스’였는데, 이들이 결혼신고를 했는지는 언급이 없었다. 정순임 씨가 신랑이 되고, 장경희 씨가 색시가 되어서 조선 고래식(古來式) 예복을 입고 요릿집에서 식을 올렸다고 했다.

  


사진은 100년 전 신문광고인데 여자들의 나체사진을 수록한 책을 선전하고 있다. ‘풍만하고 요염한 여자의 나체미의 신연구’라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가슴을 드러낸 서양 여성의 사진도 실려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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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의대 정년퇴임 후 서울여대 치료전문대학원 객원교수로 10년간 ‘성학’을 강의했다. 아태폐경학회연합회(APMF), 한국성문화회, 대한성학회 등의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국제심신산부인과학회(ISPOG) 집행위원, 대한폐경학회 회장, 대한심신산부인과학회 회장 및 세계성학회(WAS) 국제학술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단기고사는 말한다>, <사춘기의 성>, <성학>, <섹스카운슬링 포 레이디>, <시니어를 위한 Good Sex 오디세이> 등 다수의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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