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성문화

홍살문은 원래 왕릉이나 향교, 서원, 관아 등 신성한 곳에만 세우는 것이었는데 열녀를 권장하면서 이들의 집앞에 표창의 의미로 세워주기도 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고려 때는 안 그랬다.

원의 침략에 무인들은 나라를 비우고 강화로 피난 가서 삼십여 년을 그러고 있었다. 몽골군은 일곱 번이나 우리강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여인들을 욕보였다. 몇몇 우국지사들이 원종을 모시고 원에 항복을 하고야 원은 잡아 갔던 아녀자들의 일부를 도로 보냈다. 이 때 남편들은 청천강으로 압록강으로 마중 나가 부인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4백년 뒤인 임진왜란 때 자기들만 집을 떠났다 돌아온 많은 조선의 남자들은 부인이 일본군에게 욕을 당한 사실을 알았을 때 은장도를 내민다. 자신들은 몇 명의 첩을 두었어도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선조가 이런 여성 두 명을 후궁으로 삼고 이들을 불문에 부치라는 칙령을 내렸을까?

 

그 뿐인가? 얼굴 한번 본 적도 없는 약혼자가 죽었다 해서 평생을 수절하기도 해야 했던 어처구니없는 사회였다. 또 남편이 일찍 죽으면 ‘남편 잡아먹은 x’ 소리를 들으며 죄인처럼 살아야 했다. 죽어서 그 집의 귀신이 돼야한다고 생각했고 만일 부정한 일이라도 있으면 그 집안이 대대로 출세 길이 막히기 때문에 자살을 강요당하거나 때로는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미망인이란 말은 죽어야 하는데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 아닌가? 남편을 따라 죽으면 열녀라 해서 마을 입구에 무언가 표적을 남기기도 했는데 남편이 죽고 바로 목을 매어 죽은 미망인은 일등과부라 하여 그 집안에 부역이나 세금을 면해주기까지 했으니 그건 법이었다. 그 때는 여자들이 계속 아이 낳기를 그치지 않았으므로 젖먹이의 젖을 떼고 자살하면 2등 과부요, 그냥 평생수절을 하면 3등 과부였다. 그 이하는 있지도 않다.

 

특히 성종 때부터는 더 심했다. 삼강오륜 등 유교사상을 빌미로 했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유교가 아닌 주자의 성리학의 영향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여자들은 그저 삼종지도니 칠거지악이니 하는 계명의 노예였다. 우리의 역사 속에 있는 남성들의 (고상하게 얘기해서) 성문화는 그런 것이었고 오늘날의 남자들의 유전인자에도 어느 정도 남아있을 것이다.

 

성학의 입장에서 보면 21세기 대한민국의 남성들은 가히 혁명 수준의 개혁을 당하고 있다. 조상들의 원죄를 갚는다고 생각해도 좋고 새로운 성문화가 잘 자라게 기다릴 줄도 알았으면 하는 게 내 소원이다. 우리 민족은 그런 민족이 아니었다. 가능한 송사는 피하고 남녀가 이간되지 않도록 노력하자. 그리고 혼인율, 출산율 걱정도 안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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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의대 정년퇴임 후 서울여대 치료전문대학원 객원교수로 10년간 ‘성학’을 강의했다. 아태폐경학회연합회(APMF), 한국성문화회, 대한성학회 등의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국제심신산부인과학회(ISPOG) 집행위원, 대한폐경학회 회장, 대한심신산부인과학회 회장 및 세계성학회(WAS) 국제학술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단기고사는 말한다>, <사춘기의 성>, <성학>, <섹스카운슬링 포 레이디>, <시니어를 위한 Good Sex 오디세이> 등 다수의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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