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동서' 막기 위한 상피(相避)법
‘서로 피해야 할 경우’를 뜻하는 상피는 원래 가까운 친척들을 한 근무지에서 일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로 고려 선종 9년(1092) 때의 ‘오복(五服) 끼리의 상피법’에서 비롯된 말이다.
오복이란 누군가 상을 당했을 때 혈통의 원근에 따라 상복을 입는 제도를 가리키며, 여기에서는 ‘친척끼리의 상피법’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부모형제를 가리키는 ‘참최’(斬衰)는 엄격한 상피의 대상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조 때는 감사와 수령은 삼촌과 질녀의 남편까지도 상피법의 적용을 받았다.
그러다가 어느새 상피가 성관계 쪽으로 넘어왔다. 가까운 친척 사이는 물론 이들과 관계를 맺은 사람과의 성관계 또한 그 대상이 됐다. 요즘 시쳇말로 친척끼리의 ‘구멍동서’를 방지하는 것이다.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시아버지와 며느리, 형과 계수 사이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보통 ‘상피 붙다’로 표현하며, 금수(禽獸)만도 못한 행위로 보았다. ‘말도 사촌까지는 상피한다’라는 속담까지 있다.
아무에게나 수청을 들어야 하는 관기도 만일 그녀가 상대 남자의 부친과 잠자리를 한 적이 있으면, 그 아들에게는 알리고 이를 피했다. 개화기나 일제강점기 때의 기생들도 이처럼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서로 인연을 맺어서는 안 되는 관계에서의 상피는 특히 조선조 후기에 매우 엄격히 지켜졌다.
상피에 대한 기사(記事)로 대한민보의 1909년 7월 25일자 만평에 남자가 도끼로 나무를 찍고 있고 나무에 ‘임이완용 자부상피(任爾頑傭 自斧傷皮)’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 있다. ‘재주가 없는 품팔이 일꾼에게 일을 맡겼더니, 자기 도끼에 상처만 입었다’는 뜻이지만 발음으로 보면 ‘이완용이 며느리와 상피를 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완용이 절세미인이었던 큰며느리와 통정을 계속했고, 이 때문에 그의 큰 아들이 자살을 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을 때다.
나아가 여름철에 끌어안고 팔 다리를 편안하고 시원하게 해주는 죽부인(竹夫人), 소위 바람각시 또는 죽희(竹姬)도 의인시(擬人視)하여 아버지의 것을 아들이 끌어안으면 안 되었으며, 부친이 죽은 후에는 묘 옆에서 태우거나, 제사 때 제청 한 쪽에 놓아두기까지 했다.
마님이 안고 자는 것은 죽노(竹奴)라 하여 건장한 종놈을 연상케 했는데, 이 또한 함부로 관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궁녀들은 죽참봉(竹參奉), 죽별감(竹別監)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