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남존여비사상
조선조의 성 문화는 국가의 정책에 의해서 갑자기 바뀐 것이 아니라 양반 계층의 성리학 사상에 의하여 초기부터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다.
본래 성리학이 남성 중심의 사상을 앞세웠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음(陰)과 양(陽)의 대등한 관계와 조화를 말하고, 모든 사물을 음양으로 구분하여 존비, 귀천, 강유, 동정 등으로 이분화하다 보니 사회에서는 주종관계가 뚜렷해지고 가정에서는 강력한 부계의 가족질서가 확립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성리학에 바탕을 둔 조선조 가부장제 아래에서의 성문화는 필연적으로 남성우월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은 교육의 기회를 빼앗겼다. 오직 기생들만 공부를 했고, 그들은 ‘말이 통하는 여자’란 뜻인 ‘해어화(解語花)’로 불리었다.
남자 위주의 성 사고에 따라 성은 남녀 사이의 상호적이며, 인격적 교류행위가 아닌 신체적 감각행위로 전락하였고 성기중심(性器中心)의 사고로 빠지게 되었다. 여자에게 성은 생명 출산을 위한 행위이며, 가문유지의 방편이었다. 이러한 출산 위주의 성 인식은 성을 은밀하고 부끄러운 영역이며 심지어는 불결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이런 사상은 아직도 우리 국민의 유전자(遺傳子)에 깊이 박혀있다.
또 여성을 여색(女色)으로 간주하고 남성이 덕치를 하는 데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했다. 성리학에 근거한 여성관은 기본적으로 성차별이었으며,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고는 양반집 여자들뿐 아니라 모든 여성들에게 적용되었다.
성윤리에서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이중적 잣대로 평가되어, 남자들은 성적 충동을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었으나 여자들은 정절을 생명처럼 여기도록 세뇌되었다. 여자들의 사회활동은 금지됐고, 이름마저 부르지 않고 ‘누구 댁(宅)’, ‘어디 댁이니, ‘무슨 실(室)’이니 하거나 아이들의 이름을 따서 ‘아무개 모(母)’니 하며 불렀다. 또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은 중인이나 하위층 출신에 한해 궁녀, 의녀, 무당, 기생 등의 네 가지 정도가 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자는 사회적 지위도 매우 낮아, 모든 법률적 행위는 남편이나 가장을 통하거나 그의 허가가 있어야 되었으며, 교제나 외출도 엄격히 제한되어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이 아니면, 남자와 대면하지 못하였고, 외출해야 할 때에는 상류계급에서는 너울(羅兀)을 쓰고 중인이라도 장옷, 건모(巾帽) 등을 써서 얼굴을 가리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