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감 아내와 잔 소달구지꾼
다음은 영조 때 서울 용산의 한 소달구지꾼의 이야기다.
그는 하루 일을 마치고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수각교(水閣橋) 부근 담벼락에 소변을 보고 있었는데, 한 여인이 다락의 창문에 몸을 반쯤 숨기고 부른다. ‘잠깐 들어오세요.’ 그는 의아해하면서도 들어가 보았다. 그녀는 나이 갓 스물 정도로 자색이 뛰어났다. 반가이 맞이하며 자고 가란다. 남편은 별감(別監)인데 그날 밤 숙직이라고 했다.
그가 ‘소를 다른 곳에 맡기고 오겠다’고 하자, 그녀는 ‘약속 꼭 지키라’며 두 번 세 번 다짐을 했다. 저녁을 같이 먹고 이어 비단이불 속으로 함께 들어갔다.
밤이 거의 삼경이 되었을 때 갑자기 남편이 돌아왔다. 그녀는 깜짝 놀라 급히 간부를 다락에 숨기고 남편을 맞아들였다. 남편은 숙직 중에 잠이 들었는데, 꿈에 집에 불이 나서 걱정이 되어서 왔다고 했다. 기왕 집에 온 김에 그냥 갈 수 없다는 남편을 그녀는 억지로 돌려보냈다.
그는 다락에서 내려와 다시 그 짓을 계속했고, 그녀는 곧 피곤해서 먼저 곯아 떨어졌다. 수레꾼은 바로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등불 아래서 고민에 휩싸인다. ‘자기 남편은 나보다 백배나 훌륭하고, 나는 보잘것없는 짐꾼인데, 무단히 끌어들여 이런 짓을 하니 이는 전혀 음욕 때문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의기가 있는 법인데, 이런 여자를 가만둘 수 있나?’ 그는 칼로 그녀를 죽이고 새벽 일찍 도주했다.
얼마 뒤, 이 수레꾼은 한 사형수가 옥문을 나와 수레에 오르는 것을 보게 되는데, 지난번 다락에 숨어서 등불 아래로 보았던 그 여자의 남편이 아닌가? 처를 죽인 죄인이 된 것이었다. 차부는 ‘어찌 내 죽음을 아껴 무죄한 사람을 죽이랴’하며, 자수하여 자기가 범인이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관에서는 ‘한 못된 음녀(淫女)를 죽이고 한 무고한 자를 살렸으니, 이 사람은 의인(義人)이다’라며, 죄도 사해주고 면천(免賤)까지 시켜주었다.
당시 좌포도대장을 지낸 구수훈이 자신의 경험담을 쓴 ‘이순록(二旬錄)’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국성사 20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