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쟁이
옛적 우리네 어머니들이 입었던 수많은 ‘속곳’들은 오랑캐들로부터 정절을 지키려던 몸부림이었고, ‘고쟁이’는 무능한 고려의 왕들이 자신의 백성인 부녀자들을 몽골군이 보다 편리하게 겁탈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태어난 속옷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런 책이나 인터넷 기사, 그리고 여기에 ‘좋아요’로 동조한 많은 분들의 마음이 궁금하다. 절대악(絶對惡)이란 동물에서도 흔치 않은 건데, 정말 그랬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어야 한다.
고쟁이는 우리 고유의 옷으로 그 역사는 멀리 고구려 시대까지 올라간다. 당시 여자들도 속에 고쟁이 비슷한 바지를 입었는데, 고구려 벽화에도 보인다. 그때로부터 시작하여 치마 밑에 안으로부터 다리속곳, 속속곳, 바지, 단속곳을 순서대로 입는 게 우리 문화였다. 자주 전쟁에 휘말리다 보니 정절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기는 하나 알 수 없는 일이다. 살창 고쟁이는 더위에 바람 들어오도록 치마 단 바로 밑으로 구멍을 내어놓은 것이지 겁탈에 편리한 구조가 아니다.
공녀(貢女)를 보내라는 원의 계속되는 요구를 최소화하려는 고려 말년의 군신들의 노력은 여러 역사서에 남아 있다. 미혼 여자들 중에서 차출했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서둘러 여자아이들을 조혼시켰다. 질서(秩序)도 있었고, 여자들을 보호하려는 국가의 노력도 있었다. 그리고 그 조혼풍습은 20세기 초까지 이어진다.
근 40년을 강화도를 제외한 우리 영토에 정규 고려군이라고는 없었다. 몽골군들의 많은 겁탈이 자행되었을 것은 물론 불 보듯 빤하다. 나는 그 긴 세월을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나 몰라라’식으로 강화에서 꼼짝도 안 했던 무신들과 그들의 가신인 삼별초에 더 원망이 간다. 항복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무식한 돌을 역사 속에 함부로 던지지 말았으면 한다. 사람도 많이 상했지만, 그 소중한 문화재들도 대부분 그때 사라졌다.
또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반 이상이 몽골의 피가 섞였을 것이라는 생각 역시 말이 안 된다. 전국이 몽골군에게 점령당해도 그들의 주력은 주로 성(城)을 중심으로 주둔하고 있었고, 백성의 9할 이상은 농촌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도로와 교통상황을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또 몽골인의 인상이 우리와 너무 같은 것은 몽골이 원래 우리나라에서 떨어져 나간 민족이기 때문이지, 원(元) 통치 아래서 그들의 피가 많이 섞여 들어와서 그런 것이 아니다. 참고로 몽골사는 칭기즈 칸을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14대손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