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로주점
조선조 초기에는 소액화폐(엽전)의 유통을 억제하는 바람에 술집이 거의 사라졌다. 매춘도 보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18세기 들어 상평통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도시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술집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술값은 비쌌고, 금주령은 반복됐다. 영조는 직접 칼로 술 취한 관원의 목을 베기까지 했다.
술집은 18세기 후반 정조 때에 와서 번성하게 된다. 조선조 후기의 가장 대중적 술집은 목로주점(木壚酒店)과 색주가다. 신윤복의 주사거배(酒肆擧盃)는 목로주점을 그린 것이라 한다. 목로주점이란 ‘목로를 차려놓고 술을 파는 집’이란 뜻이며, 목로란 술잔을 놓기 위해서 쓰는 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요즈음 개념으로는 집안에 차려놓은 포장마차라고 생각하면 된다.
돼지고기, 빈대떡, 산적 등을 안주로 청주나 막걸리 등을 손님 요구대로 팔았다. 소주는 조선조 때는 매우 비싼 고급술이었다. 또 ‘사발막걸리집’이라 하여 막걸리를 사발로 파는 실비 목로주점도 있었다. 사발막걸리집은 목로주점의 형태이긴 하지만, 막걸리만 팔고 안주로는 간단한 조리 음식만 판매하는 저렴한 간이주점이라고 보면 된다.
혹시 프랑스 소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을 연상하면 무리가 있다. 오히려 근현대 대중가요에 나오는 목로주점의 환경을 되살리면 약간 도움이 된다.
‘(전략) 가장 멋진 목소리로 기원하려마/가장 멋진 웃음으로 화답해줄게/오늘도 목로주점 흙바람 벽엔/삼십 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