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를 사랑한 호동왕자

SBS 대하드라마 '자명고(2009)'의 한 장면


중국의 후한서에 ‘고구려는 언어나 생활습관이 부여와 유사한데,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풍속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는 남편을 잃고 생계가 어려워진 부인과 자식을 돌보기 위함과 부인이 가져온 지참금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 등이 있다. 물론 제한적으로 시행되었겠지만, 당시 성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컸을 것이다.

 

이 형사취수(兄死娶嫂, levirate)는 많은 문화권에서 기피하는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씨족사회 특히 유목민족에서는 오랫동안 시행됐다. 이렇게 태어나는 아이는 죽은 남편, 즉 형의 자식으로 간주된다. 이 제도는 동서양 모두에 있었고, 구약성경에도 나온다. 심지어는 친어머니가 아니면 아버지와 살던 여인도 취하는 소위 부사취모제(父死聚母制)도 흉노족에서 있었는데, 아프리카 빅토리아 호숫가에 사는 로우(Lou)족은 아직도 아버지의 마지막 부인을 데리고 산다. 이것은 의무인 듯 아버지가 에이즈로 사망했는데도 그러고 있는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

 

고구려로 돌아온다. 워낙 인물이 뛰어나 호동(好童)이라 불린 고구려의 호동왕자는 본래 3대 대무신왕의 차비(둘째 왕비)의 자식이었다. 그런데 대무신왕에게는 송매설수라는 원비(원래 왕비)가 있었고, 원비와의 사이에 해우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호동보다 훨씬 어렸다. 원비는 차비보다 늦게 대무신왕과 결혼했지만 강력한 토착세력 출신이어서 원비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해우는 나중에 5대 모본왕이 되는데, 백성들의 원성만 듣다가 재위 6년 만에 시종에게 살해되는 변변치 못한 인물이었다.

 

호동은 외가 세력이 빈약한 탓에, 큰 공을 세우지 않으면 자신이 왕이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낙랑국의 왕 최리의 딸과 결혼하고 자명고를 찢고 뿔피리를 파괴하게 한 후 고구려군대를 이끌고 낙랑을 정복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이 호동은 아버지의 원비인 송매설수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또한 기마민족의 풍습과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런데 대무신왕이 눈치를 챘기 때문인지, 또는 낙랑공주로 인한 질투 때문이었는지 왕비는 그를 남편에게 일러 바쳤다.

 

확실한 경위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호동은 칼을 입에 물고 자살하면서 “어머니의 죄악을 들어내지 않기 위해서”라는 의미심장한 유언을 남긴다.

 

형제역연혼과 반대되는 개념의 자매역연혼(sororate)은 아내가 죽었을 때 아내의 동생, 즉 처제와 결혼하는 것인데, 이 역시 혼인의 집단성을 보여주는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풍습은 아직도 완전히 없어졌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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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의대 정년퇴임 후 서울여대 치료전문대학원 객원교수로 10년간 ‘성학’을 강의했다. 아태폐경학회연합회(APMF), 한국성문화회, 대한성학회 등의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국제심신산부인과학회(ISPOG) 집행위원, 대한폐경학회 회장, 대한심신산부인과학회 회장 및 세계성학회(WAS) 국제학술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단기고사는 말한다>, <사춘기의 성>, <성학>, <섹스카운슬링 포 레이디>, <시니어를 위한 Good Sex 오디세이> 등 다수의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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