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이혼증서
조선조 때는 이혼에 관한 성문화된 법률이 없었으며, 남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여자를 쫓아낼 수 있었다. 다만 초기에는 고려 시대의 양성평등 풍습이 남은 탓이었는지 양반의 이혼은 좀 까다로워 임금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성종 때 이윤검이 처 손 씨를 간통죄로 고소했다. 남편은 서울, 아내는 청도에 떨어져 살았는데, 아내 손 씨가 노비 금산과 사통했다하여 휴서(休書)를 만든 남편은 아내와 별거에 들어갔다. 휴서는 요즈음으로 치면 이혼증서다. 그러자 아내는 다른 남자와 재혼을 했다. 이윤검은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았는데, 부인이 재혼했다’며 고소장을 제출했다. 성종은 그러나 ‘간통하는 현장을 잡은 것이 아니면 논죄하지 않는다. 끝까지 추궁하더라도 사실을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당시 상민층의 이혼방식은 대체로 두 가지가 있었다. 부부간에 만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때 결별 이유를 밝히고 서로 응낙한 뒤 이혼하는 현대의 합의이혼 같은 방식을 사정파의(事情罷議)라 했고, 위에서 언급한 휴서를 주기도 했는데, 이것도 문서가 아닌 어떤 징표로 대신하게 된다. 가장 흔한 형태가 지아비가 아내에게, 자신의 저고리의 옷섶을 가위로 잘라서 주는 방식이었다. 이 삼각형 모양의 옷섶을 ‘할급(割給)휴서’, ‘수세’ 또는 ‘나비’라 했다. 할급은 ‘가위로 옷을 베어서 준다’는 뜻이며, 수세는 휴서가 와전된 것이고, 나비는 그 모양을 이른 듯하다. 얼른 들으면 야박하게 느껴지지만, 오히려 그 반대이다. 여자의 재혼이 불가능했던 시대에 이를 가능하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혼의 절차이지만 '사정파의'는 너무 싱겁고, '할급휴서'는 지나치게 극적이다.
남편에게서 쫓겨난 여인이 이른 새벽 서낭당에서 가위로 자른 옷깃과 이불보를 들고 남자를 기다리면 다시 시집갈 수 있었다. 불문율처럼 그 여자를 처음 본 남자는 그 이불보로 싸서 ‘보쌈’을 가장해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간혹 노총각들에게 ‘새벽에 서낭당에나 가 보아라’하며 놀리기도 했다. 이런 여인을 ‘습첩’이라고도 한다. 암행어사를 만나 호강을 하게 된 여자도 있었다.
그런데 중기 이후로 접어들면서부터 이런 문서 형태의 증거물도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