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가슴이 드러나는 짧은 저고리
정조 때 이덕무란 이가 쓴 사소절(士小節)에 당시 여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짧고 꽉 끼는 저고리와 길고 넓게 부풀린 치마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소매통이 좁아 팔을 꿰기가 어렵고 팔을 구부리기만 하면 솔기가 터질 정도에, 심한 경우 팔이 부어서 소매를 찢어야만 벗을 수 있는 정도였다고 했다. 불편한 패션도 당시의 남성들에게 인기가 있으면 유행이 되는 법인데, 확실한 경위는 알 수 없다.
일설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여성의 외출이 금지되었고, 이에 따라 저고리가 겉옷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몸에 꼭 맞는 선정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고도 하지만 확실히는 잘 모른다. 저고리의 길이는 조선조 초기에는 77센티이던 것이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28센티가 되었으며, 그 이후에는 점점 더 짧아져 1900년경에는 20센티 정도로 옆선이 거의 없어 겨드랑이가 보일 정도가 되었다.
신윤복의 단오풍정 등 풍속화에서 여인이 입고 있는 저고리의 길이가 25센티도 안 되어 보이는 것은 시대가 1790년 이후라는 것을 의미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양 선교사나 외교관, 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유방이 노출된 여인들의 사진을 찍어 본국에 돌아가 사진엽서용으로 전 세계에 보급함으로써 20세기 초 국제무대에서 대한제국이 불리한 입장이 되는 데 크게 일조를 했다고 본다. 얼마나 야만적으로 보였을까?
복식사(服飾史) 학자 중에는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진 것이 생활이 궁핍해지면서 옷감을 절약하기 위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부터였다고도 하지만 설득이 잘 되지 않는다. 득남(得男)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란 더 말이 되지 않는다. 특히 19세기 들어서는 젖가슴이 거의 드러날 정도로 저고리 길이가 더 짧아지는데, 이를 설명할 수 없다. 결국, 고운 맵시를 위해 가는 허리를 남에게 자랑해 보이려고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정확한 계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내외법이 엄격했던 조선조 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는데, 아마 김홍도, 신윤복과 같은 당시의 풍속 화가들이 기녀들을 많이 그려 일반인들에게 알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염집 여자들이 기녀들의 화려한 모습에 매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이들은 치마도 크게 부풀려서 상박하후(上博下厚)의 모습을 하였다. 이런 패션은 처음에는 중인 및 하류층에서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차차 양반계층 여자들도 복식에서만큼은 기녀나 하류층의 복식을 모방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 같다.
서양의 얘기라 경우는 아주 다르지만 15세기 잉글랜드에서는 모르는 사이의 남녀가 인사를 나눌 때 악수 대신 키스를 했고, 16세기가 되어서는 키스 인사법이 여성의 젖가슴을 쓰다듬으며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여인의 패션이 15세기에는 V-라인으로 파이다가 16세기에 들어서는 U-라인으로, 그리고 지금처럼 젖가슴을 많이 드러내는 쪽으로 진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