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플레이크와 성(性)
역사적으로 보면 세계 모든 문화권에서 성(性)은 진보와 보수의 시기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면서 나름 묘하게 자정작용(自淨作用)을 해왔다. 그래서 지금 급변하는 성문화를 그리 크게 걱정하진 않아도 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성은 현실이다. 마치 쓰레기를 덮듯 하거나 외면만 하는 일은 나라 장래를 위해서도 좋지 않다. 대한성학회의 권리선언 중에는 '우리는 자신의 성에 대하여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성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정보와 성 건강관리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으며, 국가나 사회는 이를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것이 우리의 현실이지만, 우선 하나하나씩 알아나가야 한다. 바보는 스스로 경험해야만 비로소 배우고, 현자는 남의 경험에서 배우며, 천재는 역사에서 배운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우린 역사와 남의 경험을 꼭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요즈음은 인터넷으로 세계가 하나가 되어 외국에서 일어나는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실시간으로 알지만, 불과 한 세기 전만해도 지구 건너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거의 알지 못했다. 미국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다. 우린 미국이 자유세계의 성문화를 주도해 왔다고 믿기 쉽지만, 지난 1세기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미국은 20세기 100년 동안 개방에서 규제로, 규제에서 개방으로 바꾸기를 세 번이나 거듭했다.
희한한 성(性) 보수주의자들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여성들이 집안에서 공장이나 사무실로 나가기 시작하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에 있었던 정말 희한한 보수주의자 두 명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요즈음 우리나라에도 많이 보급된 아침 식사용 시리얼 중 하나인 ‘콘플레이크’의 대표적 상표인 켈로그(Kellogg)는 알고 보면 한 의사의 이름이었다. 예수강림교회의 신자이기도 했던 존 하비 켈로그. 그는 찰스 다윈, 토머스 에디슨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19세기 사상가 혹은 ‘두뇌’ 중 한 사람으로, 지금 일리노이주립대학교의 전신인 미국의학선교대학을 창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 미시건 주 배틀 클릭(Battle Creek)이란 곳에 요양원을 세우고 기상천외한 ‘민간요법’들을 치료 방법으로 보급한 장본인으로도 유명하다. 모든 질병의 원인이 소화기 내 불순물에 의해서 생긴다고 믿었던 그는 채식과 운동을 권하면서 하루에 약 60리터의 물에 요구르트를 섞은 뒤 환자의 입에 넣어 먹이고 또 관장을 시키는 치료를 계속했다.
콘플레이크는 성욕억제제?
그는 남자든 여자든 자위행위가 그 심신을 극도도 황폐화시키며, 이로 인하여 여드름이 생김은 물론 잘못하면 남자의 고환이 작아진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가 만든 콘플레이크는 원래 성욕을 억제시키기 위하여 만든 간이 식품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위든 섹스든 무조건 아끼는 것이 상책이라고 믿었다. 자위는 당연히 금물이고, 성행위도 꼭 임신을 위해서만 해야 하며, 그것도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 스스로도 결혼은 했지만 섹스는 한 번도 안 했다고 전해지며, 대신 40여 명의 아이들을 키웠는데, 그중 7명을 법적으로 입양했다.
자위는 야뇨증, 발기부전, 간질, 정신질환, 시력장애, 자궁암 등의 원인도 된다고 켈로그는 믿었다. 이런 질환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는 사내아이들에게 포경수술을 시켰는데, 포경수술을 마취 없이 아프게 해야만 사내아이들이 나중에 성을 경멸하도록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마저 갖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페놀 같은 부식성 약물을 이용하여 음핵을 파괴시키거나 수술로 제거하기까지 했다.
켈로그는 91세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이런 일만 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정작 ‘과실’을 따먹은 사람은 그의 동생이었다. 동생은 콘플레이크에 대한 특허권을 얻어 미국 전역에 보급함으로써 바쁜 이 나라 사람들의 아침식사에 혁명을 일으켰고, 결국 재벌의 대열에 진입했다. 그는 1934년 6600만 달러를 사회에 기증하였는데, 요즈음 가치로 치면 수십억 달러가 넘는 금액이라니 형과 아우 중 누가 더 큰 일을 한 사람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해부학 서적은 ‘빨간책’
켈로그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일을 시도한 비슷한 시기의 사람이 또 있었는데, 바로 안토니 캄스탁이었다. 남북전쟁에도 참가했던 그는 1870년 국회에서 음란물의 통신과 배달을 엄격히 통제하는 소위 ‘캄스탁 법’을 통과시켰다. 1873년에는 스스로 뉴욕의 우편검열관이 되어 이른바 미풍양속을 해치는 우편물들을 가려내면서 이들을 만들거나 배포한 사람들을 기소하는 막강한 힘을 갖게 된다. '천국의 정원에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일컬었던 그는 심지어 의대생들이 보는 해부학 책마저도 금서(禁書)라고 우겼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자신의 작품인 '워렌부인의 직업'의 공연을 방해한 캄스탁을 '미국 시민의 세금으로 지상 최대의 희극을 보여주는 자'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적이 많았던 캄스탁은 길에서 습격을 받아 머리를 크게 다쳤고,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1915년 71세로 숨진다. 그때까지 그가 폐기한 음란물은 80만 건이 넘고 그 무게만도 자그마치 160톤이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자살한 사람은 15명이었고, 그가 감옥에 보낸 사람은 4000명을 넘었다. 미국 최초의 성 교육서이며, 결혼 매뉴얼이라 할 수 있는 '웨딩 나이트'를 쓴 아이다 클래독이란 이름의 여성작가도 1902년 10월 검찰소환을 하루 앞두고 자살했는데, 그녀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나는 다른 인간에 의해서 침묵을 강요당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여성으로서 삶과 마찬가지로 죽을 권리가 있으므로 이를 행사하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피임운동가 마가렛 생어도 그에게 기소된 뒤 본의 아니게 유럽으로 도망갔다가 그의 사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성교는 짧고 성병은 영원하다?
캄스탁이 숨진 뒤 20여 년은 성 개방의 시대가 된다. 그러다가 30년대 말 할리우드 영화 검열을 필두로 다시 보수의 가치가 표면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검열관 조셉 브린, 후에 대통령이 되는 당시 루스벨트 뉴욕 주지사 등의 활동에 힘입어 미국은 다시 엄격한 성 규제의 시대로 들어간다. 그러나 성에 관한 이런 보수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자유주의 물결과 피임약의 보급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러다가 70년대 말 헤르페스(herpes) 감염이 만연하고, 80년대의 에이즈(AIDS) 출현, 그리고 보수주의자 레이건 대통령의 당선으로 성에 관한 진보적 가치관이 다시 주춤해지면서 모르는 사람과의 성관계를 기피하는 보수적 분위기가 다시 사회를 뒤덮어갔다. 당시 미국 대학캠퍼스에는 이런 말이 유행했다. ‘성교는 짧고, 헤르페스는 영원하다(Coitus is short, herpes is for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