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취수제(兄死聚嫂制)
사랑은 종류가 몇 개일까. 사랑에 대한 정의는 예부터 분분하였는데, 아직도 고대 희랍인들이 쓰던 4가지 혹은 6가지 분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아가페’(agape·이기심 없이 주는 사랑), ‘에로스’(eros·정열, 색정적 사랑), ‘스토르지’(storge·부모가 주는 애정 같은 것), ‘필리아’(philia·단순히 좋아하는 것), ‘루두스’(ludus·친구와 같이 노는 사이의 사랑), ‘마니아’(mania·감정적으로 극한 상황에 까지 이른 소유나 질투 개념의 사랑) 등이 그것.
하지만 서로 중복되거나 뚜렷이 정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이런 분류에도 무리가 있다. ‘필리아’만 보더라도 그렇다. 남녀 사이에서도 순수한 의미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얘긴데, 이를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자들도 많은 것이다.
어쩌면 사랑을 일도양단해 현대식으로 분류하는 방법 중 하나인 ‘복잡 사랑’과 ‘단순 사랑’으로 나누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경우에 따라서는 성관계까지 할 수도 있는 사이와 도저히 성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이로 관계를 분류한 것인데, 이처럼 쉽고 간단하게 사랑이 분류되는 자체도 신기하다.
형수를 아내로 삼다
자, 그렇다면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풍속인 형사취수는 어떤 종류의 사랑일까.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고구려는 언어나 생활습관이 부여와 유사한데,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풍속이 있다’고 하였다. 기마민족의 특성 중 하나인 형사취수제가 고구려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간혹 ‘형제역연혼’, ‘수계혼(收继婚)’이라고도 불리는 형사취수에는 남편을 잃고 생계가 어려워진 부인과 자식을 돌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 부인이 가져온 지참금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물론 제한적으로 시행되었겠지만 당시 성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컸을 것이다.
형사취수(levirate)는 많은 문화권에서 기피하는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씨족사회 특히 유목민족에서는 오랫동안 시행되어 왔다. 형의 아내를 이어서 취할 친형제가 없으면 사촌이 대신하기도 했다. 이렇게 태어나는 아이는 죽은 남편, 즉 형의 자식으로 간주된다. 이 제도는 동서양 모두에 있었고, 구약성경에도 나온다. 심지어는 친어머니가 아니면 아버지와 살던 여인도 취하는 소위 부사취모제(父死聚母制)도 흉노족에서 있었는데, 고구려에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사랑의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호동왕자, 아버지의 아내와 사랑을…
워낙 인물이 뛰어나 호동(好童)이라 불린 고구려의 호동왕자는 본래 3대 대무신왕의 차비(둘째 왕비)의 자식이었다. 그런데 대무신왕에게는 송매설수라는 원비(원래 왕비)가 있었고, 원비와의 사이에 해우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해우는 호동보다 훨씬 어렸다. 원비는 차비보다 늦게 대무신왕과 결혼했지만 강력한 토착세력 출신이어서 원비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호동은 외가 세력이 빈약한 탓에, 큰 공을 세우지 않으면 자신이 왕이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낙랑국의 왕 최리의 딸과 결혼하고 자명고를 찢고 뿔피리를 파괴하게 한 후 고구려군대를 이끌고 낙랑을 정복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이 호동은 아버지의 원비인 송매설수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또한 기마민족의 풍습과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런데 대무신왕이 눈치를 챘기 때문인지, 또는 낙랑공주로 인한 질투 때문이었는지 왕비는 그를 남편에게 일러 바쳤다.
확실한 경위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호동은 칼을 입에 물고 자살하면서 “어머니의 죄악을 들어내지 않기 위해서”라는 의미심장한 유언을 남긴다.
남편의 동생들에게 사랑을 청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구려 9대 고국천왕의 왕후였던 우(于) 비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녀의 권력욕 때문인 듯도 하지만, 형사취수의 제도가 고구려에 없었다면 그녀를 둘러싼 이런 역사적 사건도 일어나기 어려웠으리라.
고국천왕이 갑자기 죽자 왕후는 이를 비밀에 부치고 조용히 왕의 아우인 발기(發岐)를 찾아가 “왕이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계승하라”고 하였다. 왕이 숨진 줄 모르고 있던 발기는 “천운은 따로 돌아가는 데가 있으니 가벼이 말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부녀자가 밤에 나다니니 이것은 예가 아닙니다”라며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에 왕후는 고국천왕의 또 다른 아우인 연우(延優)의 집을 찾는다. 그에게는 “대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어른이 되어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할 터인데, 도리어 나를 비난하니 할 수 없이 찾아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우 비가 고국천왕이 숨진 사실을 발기에겐 숨기고 연우에겐 알린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우 비는 이미 연우와 깊은 관계였으며, 발기를 그녀가 먼저 찾은 것은 ‘명분 쌓기용’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연우가 왕후를 대접하기 위하여 칼로 고기를 베다가 손가락을 다쳤는데 왕후가 허리띠를 풀어 그의 다친 손을 싸매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튿날 우 비는 “선왕의 뜻”이라며 군신으로 하여금 연우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그가 바로 고구려 10대 산상왕이다. 이에 발기는 크게 노하여 군사를 일으켰지만 따르는 이가 없었다고 전해지며, 산상왕은 형수였던 우 비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
형사취수제의 원칙에 의하면 우 왕후는 사후에 고국천왕의 무덤 곁으로 가야 했지만 정작 그녀는 유언을 통해 “8년 전 죽은 산상왕 곁에 묻히고 싶다”고 하였으니, 불쌍한 건 먼저 떠난 남편 고국천왕이었다.
고국천왕은 복상사?
일설에는 불임이었던 우 왕후가 하루가 멀다 하고 성관계를 요구했고 그로 인해 고국천왕이 복상사하듯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당시 고국천왕의 무덤 앞에는 소나무가 일곱 겹으로 심어졌는데, 이는 궁중 무당의 꿈속에 고국천왕이 나타나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 분함을 참을 수 없어 심하게 다투었다. 내가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해도 차마 백성들을 대할 수 없으니, 네가 조정에 알려서 내 무덤을 가려 달라”고 하였기 때문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이런 나쁜 평가들 때문인지, 조선시대 발간된 <동국통감>은 그녀에 대해 “그 행위가 돼지보다 못하며, 천리(天理)가 무너지고 인도(人道)가 끊어졌다. 천하 고금에 더러운 행동과 도덕에 위배된 짓을 한 자는 특히 이 한 사람뿐”이라고 기록하면서 여성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최악’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형이냐 동생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런데, 형사취수의 케이스는 신라에도 있었다는 사실!
25대 진지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용수(龍樹)와 용춘(龍春)이 그들이었다. 형인 용수는 진평왕의 딸이자 선덕여왕과 자매 사이였던 천명부인(天明夫人)을 아내로 맞아 아들 춘추를 낳았고 벼슬이 대장군에까지 이르렀으나 일찍 죽고 말았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그는 아우 용춘에게 아내와 아들을 부탁했고, 용춘은 이들을 자신의 처자로 삼았다. 작은아버지의 아들이 된 춘추는 후에 태종무열왕이 된다.
원래 용수와 용춘 형제는 모두 천명공주를 사모했었다. 천명의 모친인 마야 왕후는 어느 날 궁중에서 잔치를 벌이면서 동생인 용춘을 불러 천명과 함께 지내도록 했고, 이후 둘은 각별한 사이로 보였다. 천명공주가 사랑하는 인물이 자신이 아니라 동생임을 알게 된 형 용수는 공주를 동생에게 양보하려 했으나 아우가 힘써 사양하면서 형과의 결혼이 이루어진 터였다.
그러나 동생 용춘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자는 훗날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 공주였던 것! 실제로 용춘과 덕만 공주는 한 때 같이 살기까지 했다. 이런 복잡한 상황들이 천명공주의 거취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여하튼 고구려나 북방의 기마민족에서 보던 형사취수 사례가 신라에도 있었다는 얘기이므로 흥미롭다.
형제역연혼과 반대되는 개념의 자매역연혼(sororate)은 아내가 죽었을 때 아내의 동생, 즉 처제와 결혼하는 것인데, 이 역시 혼인의 집단성을 보여주는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풍습은 아직도 완전히 없어졌다고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