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내어주는 풍습, 있었을까?
신라왕의 칭호는 초대 박혁거세 때는 ‘거서간’, 2대 남해는 ‘차차웅’이었다가 3대부터 16대까지는 ‘이사금’이었고, 17대부터 21대까지는 ‘마립간’이었다. 22대 지증왕으로부터 비로소 ‘왕’이라 불리기 시작하지만, 그도 처음에는 ‘지증마립간’이라 불리다가 왕으로 칭호가 바뀌었으므로 그를 마지막 마립간으로 보기도 한다.
거서간은 ‘정치의 으뜸’이란 뜻이고, 차차웅은 ‘제사장’을 의미한다. 이사금은 ‘잇금’에서 나온 말인데, 이가 많은 사람이 현명하다고 믿어 이로 깨문 자국을 보았다는 얘기에서 비롯된다. 마립간은 ‘말뚝’을 의미하는데, 왕의 말뚝을 가장 높은 곳에 쓴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하튼 마지막 마립간이라 할 수 있는 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재위 479-500)은 여인들과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역사 속에 적지 않다.
까마귀가 알려준 아내의 ‘불륜’
어느 날 왕이 천천정이라는 정자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까마귀와 쥐가 와 울더니 쥐가 사람말로 “이 까마귀를 따라 가보라”고 했다. 하도 기이하여 왕의 부하가 까마귀를 따라갔는데, 도중에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그만 까마귀를 놓쳤다. 당황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연못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주었다. 그 겉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라고 쓰여 있었다. 왕은 두 사람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 없던 일로 하자고 했지만 신하들은 한 사람이면 그게 왕일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봉투를 열어보니 ‘거문고 집을 쏘아라(射琴匣)’라고 쓰여 있었다.
급히 궁으로 돌아와 무사들을 시켜 거문고집을 활로 쏘았더니 피가 튕겨 나오고 그 안에서 왕비인 선혜(善兮)부인과 내전에서 불공을 드리는 묘심(妙心)이란 중이 나오는 게 아닌가. 왕비는 폐출(廢黜) 당하고, 묘심은 바로 죽임을 당한다.
'45cm' 대물 지증왕
소지의 후궁들 중에는 다음 왕인 지증왕의 왕후인 연제부인도 있고 그녀와의 사이에 산종(山宗)이라는 아들까지 있다는 설도 있는데, 지증왕의 음경이 하도 커서 특별히 구해온 7척 장신의 여인이 연제부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앞뒤가 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의 기록이니 사실일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지증왕의 음경은 요즈음 도량형으로 치면 ‘45㎝’나 되었는데, 발기 전 크기인지 발기 후 크기인지는 기록에 없다. 지증왕은 소지마립간의 6촌 형으로 64살에야 왕이 된다. 따라서 연제부인은 지증왕이 보위에 오르기 훨씬 이전에 궁으로 들어왔을 것이고, 워낙 여자를 좋아했던 소지마립간이 왕의 권한으로 한동안 그녀를 취했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외 시대 순으로 본 후궁들로 보혜(寶兮), 이복동생인 준명공주, 홍수(洪水), 보옥(寶玉)공주, 묘양(妙陽), 가야의 융융(隆隆)공주 등이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잠시이지만 왕후 대접까지 받았던 벽화(碧花)부인이 있고, 벽화의 어머니인 벽아(碧我)부인 김 씨도 있다.
까마귀 사건은 우리민족이 까마귀를 먹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정월 대보름을 오기일(烏忌日) 또는 달도(怛忉)라 하여 찰밥으로 제사 지내고 슬퍼하고 근심하면서 모든 일을 금하는 풍습도 생겼다. 노인이 나와 글을 바쳤다는 그 연못은 서출지(書出池)라 했는데, 현재 경주시 남산동에 있으며 둘레가 약 200m인 별로 크지 않은 못이지만 사적 제138호로 지정돼 있다.
충신의 아내와 외동딸을 취하다
이 사건으로부터 12년 뒤 소지마립간은 변방 순찰 중에 시쳇말로 과잉충성의 충직한 신하인 파로(波路)의 접대를 받는다. 파로는 왕을 집으로 맞아들여 그 잠자리에 자신의 아내를 들여보냈고, 다음날 왕이 떠날 때는 외동딸 벽화를 비단으로 감싸 수레에 태워 보냈다. 이목이 두려운 왕은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그 미모를 잊지 못하여 자주 파로의 집을 찾았는데 소문이 퍼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아예 궁으로 데려와 후궁으로 삼았다.
소지마립간, 지나친 ‘방사’로 죽었을까
벽화가 궁에 들어온 것이 500년 9월이었는데, 왕은 그 해 11월에 세상을 떠난다. 그 때 벽화의 나이가 고작 16살이었으니, 사람들은 소지마립간이 지나친 방사(房事)로 몸이 쇠약해져서 죽었다고 믿었고, 역사도 그렇게 썼다.
그러나 성교가 남자를 그렇게 죽이는 것은 아니다. 출생 연도가 미상이지만 당시 소지마립간은 마흔 전후의 나이였다. 후사가 없어 왕의 6촌 형이 뒤를 이었는데, 벽화는 그 뒤를 이어 법흥왕이 되는 김원종의 여인이 된다.
일본의 요바이(夜這い)는 원래 밤중에 성교를 목적으로 모르는 사람의 침실에 침입하는 서(西) 일본의 옛 풍습이었는데, 대부분 구혼을 위해 남자가 여자의 침소에 들어가는 행위였다고 한다. 일종의 옛 혼인풍습이었던 셈인데, 차차 부모나 상대의 허락 없이 이성의 침실에 몰래 침입하는 불순한 행위를 가리키게 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아내를 내어주는 까닭
요바이가 상대의 의사를 무시한 폭력인 강간과 같은 것인지, 상대방도 어느 정도 동의한 후 이루어지는 행위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쩌면 여러 상황들이 혼재되어 있어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중에는 길손에게 자신의 아내를 내어주는 것도 포함된다고 한다. 이 때 손님이 아내를 거절하면 그 여자는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는데, 약 천 년 전쯤 사라진 풍습이어서 확실히는 잘 모르는 듯하다. 그러나 단순히 강간을 목적으로 남의 집에 침입하는 것은 아닌 듯하며, 오히려 부분적으로는 우리네 ‘보쌈’의 일본식 버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신라시대, 스와핑은 없다?
‘바렌(The Savage Innocents)’이란 영화에서 '이뉴잇' 에스키모로 나온 안소니 퀸은 자신의 아내 요코 다니(일본 여배우)를 선교사에게 ‘대접’하다가 거절당하자 ‘아내는 늘 새롭다’며 그를 죽인다. 에스키모 이외에도 인도의 토다족, 시베리아의 척치족, 고대 게르만민족에게도 이런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매우 희귀한 경우들일 것이다. 스와핑(Swapping. 일정 기간 배우자를 교환하는 것), 스윙잉(Swinging. 파트너를 바꿔가며 성행위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므로 구분해야 한다. 그런데 비록 야사(野史)이지만 신라에서 이런 대처(貸妻)의 경우가 두 번이나 나오니 그들의 성 문화를 어떻게 봐야 할지 혼란스럽다.
또 다른 예는 김춘추의 서자인 차득공이 거사(居士)차림으로 밀행하던 과정에서 안길(安吉)이라는 향리 집에 묵었을 때 일어난다. 안길은 밤이 되자 처첩 셋을 불러 말했다. “오늘밤에 손님을 모시고 자면 내가 몸을 마치도록 함께 살 것이오.”
이에 두 아내는 “차라리 함께 살지 못할지언정 어떻게 남과 몸을 섞는단 말이오”라고 했지만, 그 중 한 아내는 “그대가 몸을 마치도록 함께 살겠다면 명령을 받들겠습니다”라 하고 그의 뜻을 따랐다는 얘기인데, 이는 신라의 남자들이 쉽게 처첩을 버릴 수도 있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또 처첩이라 함은 대부분 1처 2첩을 의미하는데, 본처와 첩을 동가(同價)로 놓고 이런 제안을 했다면 안길의 의중(意中)을 의심케 하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