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가(處容歌)

사모를 쓴 처용 화상. 악귀를 쫓기 위해 대문에 붙이곤 했다.


처용가(處容歌)는 신라 49대 헌강왕 때 처용랑이 지었다는 향가(鄕歌)의 이름이다.

 

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처용은 동해의 용왕의 아들로 태어나 신라 도성에 들어와 왕정을 돕고 있었다. 왕이 중매해준 그의 아내는 매우 예뻤는데, 그가 없는 동안에 역신(疫神)이 밤만 되면 사람으로 변하여 그의 집에 들어와 몰래 자고 가곤 하였다. 처용가는 어느 날 처용이 집에 돌아와 이들이 동침하는 것을 보고 지은 노래라고 한다. 이 노래를 들은 역신은 놀라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고 앞에 꿇어앉으면서, ‘지금까지 그대의 처를 탐내어 범해 왔는데, 공이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탄하고 존경합니다, 맹세코 공의 형용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하며 탄복하여 돌아갔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처용화상을 그려 문에 달아 두면 악귀를 쫓는다고 믿었다고 한다.

 

당시의 신라 성 풍습으로 보아 흔히 있었던 불륜의 현장이 남편에게 발각된 장면 같다. 그런데 왜 역신이 범한 것이라고 했을까? 그때에도 많은 외국인들이 서라벌에 살고 있었는데, 그 남편이 아랍계 인물이어서(처용의 탈이 그렇게 암시) 그리고 그가 별 질투심을 느끼지 못해서 이런 노래를 부른 것일까, 질투는 동물들도 하는 건데 그렇게 의연할 수가 있었을까 등의 의문이 뒤따른다.

 

당시에는 귀신과 교접을 해도 아이를 밸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나온 아이를 귀태(鬼胎)라고 부르기까지 했는데, 매일 밤 사람으로 변한 역신이 왔다면 왜 처용의 아내는 남편에게 이를 고하지 않았을까?

 

여하튼 이 이야기는 그로부터 4백 년 후 고려 때의 일연(一然)스님의 생각이며, 통일 신라 당시의 성 풍속을 잘 몰랐을 가능성도 크다. 필연 진실은 처용이 용왕의 아들이 아닌 서역인(西域人)이었고, 그 아내는 악귀가 아닌 이웃 남자를 정부로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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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file

    부산의대 정년퇴임 후 서울여대 치료전문대학원 객원교수로 10년간 ‘성학’을 강의했다. 아태폐경학회연합회(APMF), 한국성문화회, 대한성학회 등의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국제심신산부인과학회(ISPOG) 집행위원, 대한폐경학회 회장, 대한심신산부인과학회 회장 및 세계성학회(WAS) 국제학술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단기고사는 말한다>, <사춘기의 성>, <성학>, <섹스카운슬링 포 레이디>, <시니어를 위한 Good Sex 오디세이> 등 다수의 저작이 있다.
댓글
  • 처용 이라는 자 마음이 그렇게 남자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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