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공주'라 불렸던 성매매 여성들

기지촌 모습


해방 후 미군정 때 그리고 한국동란 중 주한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을 미군 위안부, 양공주, 또는 양갈보라 불렀는데, 그밖에 양색시, 유엔마담, 히빠리, 주스 걸(필리핀에서 쓰던 말)이라고도 했다. 처음에는 그저 위안부라고도 불렀으나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여성(그 때는 종군위안부라 불렀다)들이 커밍아웃하면서부터 위안부란 말은 거의 안 썼다.


이들은 한국 매춘녀 사회에서도 최하층이었으며, 아무도 상대하려 하지 않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취급을 당하였다. 그러나 한국을 방위하는 데 필요했던 주둔군인 미군을 위한 기지촌을 정부도 어쩌지 못했다. 동맹국의 한 부분으로 보고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성매매 여성들에게 성병예방과 반공사상, 영어 등을 교육시키는 등 기지촌 거대화의 기초를 다져주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미군기지 주변으로 주한 미군을 상대로 한 소매업, 유흥업 또한 성행하였는데 열악했던 국내 시장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고, 여기에 양공주들의 역할 또한 적지 않았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들의 존재를 필요악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패전국 일본에서는 이들을 전혀 천민시(賤民視)하지 않았다. 정부가 매춘여성이나 전쟁미망인들 일부가 미군들의 성 상대가 되어주는 것이 다른 일본 여성들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처럼 인식케 하여, 미군 위안부가 되도록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피폐했던 전후 경제재건을 위한 외화획득에 도움이 컸던 일면도 있었을 것이다.


처음 도쿄 만에 여성 1,360명이 몰렸고, 이후 확대되어 30여 곳이 되었다. 하룻밤에 미군 47명을 상대한 여성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일본 여성의 수는 사무직까지 포함하면 55,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더러 이들을 민간 외교관, 달러벌이 역군(役軍) 또는 부녀자들을 보호해 주는 애국자(?)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분명 당시 이들의 존재에는 양면적인 성격이 있었다. 우선 여성 자신들의 필요에 따른 것으로 극도의 생활난과 남성부재(男性不在)라는 현실, 그리고 가진 것이라곤 ‘몸’밖에 없다는 잘못된 인식이 그 하나요, 수십만에 달하는 미군을 비롯한 군인이라는 특수하고 격리된 ‘남성’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그 둘째였다.


한동안 외국군위안부를 ‘양갈보’라 부르면서 내국인 상대의 매춘녀를 ‘똥갈보’라 불렀다. 이때는 우리 토종개를 보통 ‘똥개’라 부르던 때라 별 저항 없이 자신들도 이를 받아들였다. 비공식 통계이긴 하지만 1950년대 말, 이 두 부류(部類)의 성매매 여성들은 거의 비슷한 숫자였고, 전국에 모두 약 15만 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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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의대 정년퇴임 후 서울여대 치료전문대학원 객원교수로 10년간 ‘성학’을 강의했다. 아태폐경학회연합회(APMF), 한국성문화회, 대한성학회 등의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국제심신산부인과학회(ISPOG) 집행위원, 대한폐경학회 회장, 대한심신산부인과학회 회장 및 세계성학회(WAS) 국제학술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단기고사는 말한다>, <사춘기의 성>, <성학>, <섹스카운슬링 포 레이디>, <시니어를 위한 Good Sex 오디세이> 등 다수의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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