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사랑
신화를 강의할 때마다 수강생들로부터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받는 질문이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나 사람 이름을 쉽게 외우는 비법이 있느냐는 것이다. 수강생들은 신화를 공부하려고 굳게 결심을 했다가도 막상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 길고 이국적이며 수많은 이름에 맞닥뜨리면 기가 질려 포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소연한다.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언제나 똑같다. “신화에서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어려운 이름일수록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자주 나오는 쉬운 이름으로 치부하고 그냥 지나쳐라. 신화의 핵심은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정권을 잡은 신족을 올림포스 신족이라고 부른다. 제우스가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산인 올림포스 산에 산성을 쌓고 티탄 신족과 맞서 싸워 이겼기 때문이다.
올림포스 신족은 다시 1세대와 2세대로 나뉜다. 1세대는 제우스의 형제자매를, 2세대는 제우스가 낳아 대업을 맡긴 신들을 말한다.
그리스 신들은 로마로 그대로 받아들여지면서 이름만 다르게 불렀다. 그리스 신들의 로마식 이름에서 다시 영어식 이름이 나왔으니, 하나의 신을 두고 세 가지의 다른 이름이 있는 셈이다.
어떤 독자는 이 세 가지 이름이 서로 다른 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적어도 그리스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신들의 로마식, 그리고 영어식 이름만은 구분해서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제우스와 형제자매들인 1세대 신들.
신들의 왕 제우스(Zeus)는 로마에서는 유피테르(Jupiter), 영어로는 주피터(Jupiter)라 한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은 로마에서는 넵투누스(Neptunus), 영어로는 넵튠(Neptune)이라고 했다.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Hades)는 플루톤(Plouton)이라고도 했는데, 로마에서는 플루토(Pluto), 영어로도 플로토(Pluto)라 했다.
가정의 여신 헤라(Hera)는 또 어떠한가. 로마에서는 유노(Juno), 영어로는 주노(Juno)다. 곡물의 여신 데메테르(Demeter)는 로마에선 케레스(Ceres), 영어론 세레스(Ceres).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Hestia)는 로마에서는 베스타(Vesta), 영어로는 베스터(Vesta)라고 했다.
그 다음은 제우스가 대업을 맡긴 2세대 신들.
태양의 신 아폴론(Apollon)은 로마에서는 아폴로(Apollo), 영어로도 아폴로(Apollo). 전령의 신 헤르메스(Hermes)는 로마에서는 메르쿠리우스(Mercurius), 영어로는 머큐리(Mercury)라 했다.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Hephaistos)는 로마에서는 불카누스(Vulkanus), 영어로는 벌컨(Vulkan). 전쟁의 신 아레스(Ares)는 로마에서는 마르스(Mars), 영어로는 마즈(Mars)다.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Dionysos)는 박코스(Bakchos)라고도 했는데, 로마에서는 바쿠스(Bacchus), 영어로는 바커스(Bacchus)다.
잘 알려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는 어떨까. 로마에서는 베누스(Venus), 영어로는 비너스(Venus)다. 달과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는 로마에서는 디아나(Diana), 영어로는 다이아나(Diana). 지혜의 여신 아테나(Athena)는 로마에서 미네르바(Minerva), 영어로도 미네르바(Minerva)라 했다. 마지막으로 짓궂은 장난꾸러기 사랑의 신 에로스(Eros)는 로마에선 쿠피도(Cupido) 혹은 아모르(Amor), 영어로는 큐피드(Cupid)다.
그리스 신화는 올림포스 신족의 12주신(主神)과 그들의 자손에 관한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주신은 원래 남신(男神)은 제우스, 포세이돈, 아폴론, 아레스, 헤파이스토스, 헤르메스 등 6명, 여신(女神은) 헤라, 데메테르, 헤스티아, 아테나, 아르테미스, 아프로디테 등 6명이었다. 그런데 맨 나중에 디오니소스가 올림포스 신족에 합류하자 헤스티아가 자리를 양보하면서 남신은 7명, 여신은 5명이 된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본주의였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의 유명한 말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인간은 ‘만물의 척도’였다. 그들이 인간을 얼마나 중시했으면 신들에게 인간의 모습을 투영했을까. 그리스 신들은 인간을 빼닮았다. 인간처럼 사랑하고, 싸우며, 도둑질하고, 간통한다.
그래서 그리스 신들은 각기 다양한 인간유형 중 하나를 구현하고 있다. 헤라 여신은 헤라 유형의 여자를, 제우스 신은 제우스 유형의 남자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단 얘기다.
이 시리즈는 그리스 신화의 12주신에 하데스와 헤스티아를 보탠 총 14명 그리스 신들의 이야기를 사랑이란 테마에 초점을 맞춰 세대 순으로 살펴본다. 그 안에는 사랑과 질투와 이별과 응징이 있으며, 신들 각각이 대변하는 인간의 유형이 있다.
필자는 지난 2년여 동안 SBS 라디오프로그램 <책하고 놀자>의 ‘김원익의 그리스 신화 읽기’라는 코너를 통해 그리스 신화를 두고 주제별로 씨줄과 날줄로 가르며 다양한 해석을 시도했다. 이 시리즈는 그중 그리스 신들을 둘러싼 사랑의 이야기를 전한 부분에다 당시 미처 하지 못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보태 펴낸 것이다.
내 사랑은 과연 어떤 신의 사랑을 닮았을까? 나는 과연 어떤 신을 닮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