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동은 色女보단, 자유정신의 詩人?
[이성주의 性뒤집기]
1480년 오늘(10월 18일),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비련의 여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어우동(於宇同)이 교형(絞刑)을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어우동은 조선의 법적 기틀에 해당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한 성종에 의해 법을 뛰어넘는 ‘괘씸죄’로 죽어야만 했다.
어우동은 1985년 이보희 주연의 이장호 감독 영화를 비롯, 숱한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가 됐지만 많은 사람들이 베드신으로만 기억되는 여성이다. ‘어우동=요녀’라는 신화가 540년 이상 내려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어우동의 교형은 한국사에서 여성인권과 성을 억압한 이정표가 되는 사건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어우동은 어을우동(於乙宇同)이라고도 표기하는데 ‘어을’은 서동요에 나오는 ‘얼하다’와 같이 섹스하다는 뜻이다. 경상도에서는 1970년대까지 섹스를 ‘얼빵’이라고 불렀는데 같은 어원이다. 어우동, 어을우동은 ‘(여럿과) 함께 섹스한 사람’이라는 뜻이고, 본명은 박구마(朴丘麻)로 추정된다.
그는 본관이 음성 박씨로, 충북 음성군 음죽현에서 박윤창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외교 문서를 담당하고 외교 관련 실무자들을 교육하는 승문원의 지사를 담당한, 종3품 고위공무원이었다.
어우동은 양반 댁 규수로 평온하게 자랐지만 효령대군의 손자 태강수 이동(李仝)과 결혼하면서 인생이 꼬여버렸다. 어우동은 집에 온 은(銀) 세공사와 바람이 났다는 이유로 파혼 당했는데, 조정에서 알아보니 이동이 기생 연경비에게 빠져서 본처를 쫒아낼 목적으로 모함한 것으로 드러났다. 임금은 이동에게 어우동과 재결합하라고 했지만, ‘못난 남편’은 이를 무시하고 아내를 내쫒았다.
어우동은 친정으로 돌아왔지만, 박윤창은 왕족에게서 버림받은 ‘출가외인’ 딸을 집안에 들이지 않았고, 어우동은 할 수 없이 집을 구해 여종과 함께 살았다. 이때 여러 남성과 간통을 했다는데, 실질적 홀어미인 어우동에게 이 죄를 적용할 수 있을까?
어우동은 의금부에 잡혀 와서 문초를 당하는데, 몸에 세종의 손자인 방상수 이난을 비롯한 세 남자와의 정표를 약속하는 문신이 발견됐다는 점에서 몇 명과 섹스를 한 것은 맞아 보인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종과 섹스를 한 것은 종 지거비의 협박에 따라 성폭행을 당했다고 나오고, 어우동의 파트너로 알려진 16명 중 대부분은 ‘무죄’ 또는 ‘모함’으로 판결났다. 어우동의 파트너는 방산수뿐 아니라 정종의 종손인 수산수 이기도 있었으며 고총관(무관 최고직) 어유소, 대사헌 노공, 형조 참판 김세직 등 줄줄이 출세가도를 달렸다.
어우동의 공식 죄는 간통이었다. 형법에 유부녀의 간통은 장 90대이고, 남자를 꾀어서 섹스하면 장 100대에 처해졌지만 대부분 벌금으로 갈음할 수 있었다. 이를 속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종은 신하들이 만류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강상죄(綱常罪)를 물어 사형을 강행했다. 강상죄는 삼강오륜을 어긴 죄나 노비가 주인을 구타 또는 살해한 극악무도한 죄에 해당한다. 성종이 폐비 윤 씨에게 시달리고 있어 어우동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설득력 있다. 성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과부재가금지법’을 관철시킨, 반여권(反女權) 왕이기도 하다. 어우동을 교형에 처하도록 한 것은 성종이 왕족을 ‘구멍동서’로 만든 데 대해서 분노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우동의 교형은 형평에도 어긋난다. 그 많다는 파트너 가운데 방산수만 장 100대의 형을 받았는데 속전으로 갈음하고 경상도 사천 곤양으로 유배를 갔으며, 10년 뒤 귀경한다. 성종은 3년 뒤 귀양을 풀어주려고 했지만, 신하들이 반대해서 할 수 없이 10년 귀양살이를 했다. 어우동을 교형에 처했으면 상대편 남성들도 그에 합당하는 죄를 물어야 함에도,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고 승승장구했다. 성종이 아니었더라도 어우동이 죽었을까?
어우동은 자유로운 정신의 여성이었던 것 같다. 사료를 보면 그는 시와 서화에도 능했지만, 행실이 단정하지 않다는 이유로 작품들을 소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어우동의 집은 ‘자유정신의 여성’과 담론을 나누고 싶은 남성들이 줄을 이었고, 어우동은 이 가운데 마음을 열 가치가 있던 몇 명과 정을 통했을 가능성이 크다.
장지연이 편찬한 《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어우동이 지은 ‘부여회고(扶餘懷古)’라는 시가 나온다. 이 책에선 시를 소개하고 “이 시는 ‘송계만록’에 실렸는데 (그 책에선 어우동이) 호서(湖西)의 창(娼)으로 농부의 딸이었지만, 단정하지 않아 그 시가 뛰어나나 (다른 작품은) 싣지 않았다”고 했다. 그 작품들이 남아있었다면 조선 문학사가 다시 쓰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동짓달 한 허리를 잘라낸 시상을 표현한 황진이 못지않은 시들이 남았을 수도 있을 텐데…. 아쉽지만, 그의 정신이 남아있는 흔적을 소개한다.
부여회고(夫餘懷古)
텅 빈 백마대 누각은 몇 해가 흘렸는지
낙화암은 선채로 많은 세월이 지났네.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았다면
천고의 흥망을 물어서 알 수 있으련만….
白馬臺空經幾歲 落花巖立過多時
靑山若不曾緘黙 千古興亡問可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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