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포스터



여자들이 SM을 좋아한다고?

 

 “저런 남자가 현실에 있을까요?” “그레이 같은 남자라면 SM도 두렵지 않아요, 그런 남자랑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읽은 여성 독자들의 후기다. 방송사의 간부로 일하다 지금은 평범한 가정주부인 E.L. 제임스라는 중년여자는 인터넷 블로그에 연재했던 이야기가 크게 인기를 끌면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이 책은 처음에는 SM(새도 매저키즘: 상호합의 하에 주인과 노예의 역할을 가지고, 서로 고통을 주고 받으면서 쾌감을 얻는 성행동)을 그린 이야기로 소개되었고, 언론들은 SM에 끌린 여성 독자들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정작 여자들이 끌린 이유는 SM이라는 파격적인 성행위가 아니라, 여성 성심리를 꿰뜷고 있는 그레이라는 남자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아나스타샤라는 평범하고 순진한 여대생이 억만장자이며 젊고, 머리도 좋으며, 게다가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남인 사업가의 프러포즈를 받아 그야말로 신데렐라가 되는 이야기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난한 젊은 여자가 준수한 재벌남자를 만나 그의 사랑을 받고 결혼에 골인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이런 주제를 잘 조합만 하면 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 그레이는 그저 돈이 많은 평범한 재벌이 아니라 머리가 비상하게 좋을 뿐 아니라, 여자들의 호기심을 끌어당기는 밀당의 천재이다.

 ‘진토닉’을 주문해도 그레이는 그냥 평범한 진토닉이 아니라, “헨드릭스나 봄베이 사파이어로. 헨드릭스에는 오이를, 봄베이에는 라임을 넣어달라”는 특별한 주문을 하는, 007 같이 취향이 섬세한 남자이다. 여자들은 지루하거나 평범한 착한 남자보다는 자기를 쥐락펴락하는 나쁜 남자에 더 끌리는 약점 이 있다. 이런 여자들의 약점을 파고든 남자가 바로 그레이다. 그레이와 영문학도 아나스타샤의 밀고당기는 이메일을 읽으면서 여자들은 그들의 탄산수같이 짜릿한 연애에 함께 빠져든다.

 

남자여 여자의 심리, 취향을 읽어라

 

 소설 속 아나스타샤는 평범한 여대생 같지만 사실은 이 시대에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여자이다. 우선 그녀는 대학 졸업반이 되도록 한번도 남자와의 성경험이 없고, 심지어 키스 경험조차 없는 순결무구한 여자이다. 심지어 요즘 여자답지 않게 ‘테스’를 좋아하는 아나스타샤의 처녀지 같은 성적 경험은 오로지 그레이에 의해서 개척(?)되고, 개발되어 간다. 이제까지 많은 여자들과 환락의 성경험을 해왔던 그레이가 아나스타샤와의 관계에서 예외가 많아질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아나스타샤가 순결한 여자였고, 그에 의해 고지가 점령된 그야말로 자신의 여자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그래서 신데렐라의 조건은 순결’이라고 얘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성적으로 유능한 남자에 의해 개발되어 가는 ‘복받은 여자’를 제시함으로써 여자들의 성적 환타지에 불을 질렀다.

 

 그레이는 무엇보다 여자의 취향을 정확히 아는 남자다. 겉으로만 보면 그는 무척 일방적이고, 자기 기분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여자를 자신과 평등한 대상이 아니라 소유물로 생각하며, 여자가 입을 옷과 살 방도 그의 취향대로 꾸며져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여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럭셔리한 제품들로 채워놓는다. 다시 말해 여자의 취향을 저격한다.

 그레이는 또 심리전의 고수다. 적극적으로 아나스타샤에게 접근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짐작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평범한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위기 상황에 흑기사처럼 나타나나 자신을 구해내고(사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나의 현재 위치와 생활이 어떤 사람에 의해 꼼꼼히 모니터 되고 있다는 것이!), 자신과의 데이트를 위해 자가용 헬리콥터를 띄우는 남자. 자신을 만나기 위해 자가용비행기로 4천 마일을 단숨에 날아오고, 영문학도인 아나스타샤에게 첫 선물로 테스의 초판본을 보내 오고, 최고급 사양의 노트북과 고급 자동차를 선물하는 그레이에게 단숨에 함락되어 간다. 작가는 아나스타샤가 그저 돈에 무릎을 꿇는 자존심 없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그래야 이 책에 빠져 읽는 독자들의 자존심을 살릴 테니까) 거절의 모습도 보여주지만, 아나스타샤는 언제나(!) 그의 선물을 받아들인다.

 특히 그레이와 사랑을 유지하는 계약은 더욱 여자들을 열광하게 한다. 겉으로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계약의 저변에는 주인의 행위로 인해 여자를 다치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자의 건강을 관리하고(원치 않은 임신 예방뿐 아니라 평소의 건강관리에 대한 배려가 포함되어 있다), SM의 성행위에서조차 여자가 원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그만둬야 하는 조항이 들어 있다.

 또 그레이는 아나스타샤가 어디에 있는지 언제나 알고 있으며, 서로에게만 헌신해야 한다는 집착적인 사랑의 소유자이다. 게다가 작가는 여자들이 가장 취약한 부분이 어디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레이가 어릴 때 받은 상처-고아로 외롭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 나이든 여자에게 성적인 학대를 당했다는 것-를 보여줌으로 여자들의 모성애 본능을 건드린 것이다. 많은 여자들이 불행하거나, 뭔가 부족한 남자들을 보면 자기가 그를 구원할 마돈나라고 착각하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그래서 아나스타샤는 그레이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돈도 있고 명예도 있고 명분도 있기 때문이다.

 

여자도 성적 판타지가 있다

많은 여자들이 '강한 남자에게 당하는 거친 섹스'를 성적 판타지로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이뤄지길 바라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레이의 최대 장점은 무엇보다 여자들의 성에 대한 판타지를 안다는 것이다. 대개의 여자들이 일방적인 남자파트너의 섹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작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소설 속 그레이는 여자의 성에 아주 능숙한 남자이다. 그레이가 섹스를 여자로부터 배웠다는 사실은 그레이가 얼마나 여자를 만족시키는 섹스를 할 것인가를 상상하게 해준다. 평소에 보수적인 가치관 때문에 여자들은 원하는 체위나 행위가 있어도, 그래서 만족스럽지 못해도 남자들에게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요구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레이는 아주 주도적으로 자기를 이끌었던 여자를 통해 이미 여자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다 넘치게(?) 알고 있다. 그러니 얼마나 황홀한 섹스를 여자에게 선사할 것인가?

 또 많은 여자들이 ‘강한 남자에게 당하는 거친 섹스’를 성적 판타지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할 점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성적 판타지는 무척 다르다는 점이다. 남자들은 자신의 성적 판타지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에 집중하지만, 여자들은 자신의 성적 판타지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기대가 없다.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그래서 강간당하는 상황에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실제로 자신이 강간당하고 싶다가 아니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어쨌든 그래서 우리의 그레이는 SM을 가장하여 사랑이 아닌 계약을 하며(사실은 계약이 아닌 사랑을 하며가 맞겠지만), 여자를 눈 가리고, 묶고 혹은 벌을 준다며 무릎에 눕혀 엉덩이를 아프게 때리기도 하고, 아나스타샤를 지배하는 듯하다. “날아오는 매를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좀더 바랐기 때문..”이라고 아나스타샤는 그의 강렬한 지배를 원한다. 이렇게 거친 섹스에 대한 여자의 판타지를 실현해주며 여자를 황홀경으로 끌고 간다. 동시에 그레이는 남성 주도적인 섹스를 하지만 현실 속 남자들이 그렇듯이 자기만의 흥분과 만족만을 추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상대 여자의 만족을 더 추구한다. 그러니 어찌 여자들이 그레이에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남자들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세심히 읽는다면 여자들이 원하는 섹스가 무엇인지 간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훅’ 끌리는지, 그에게 빠져들어 헤어 나올 수 없는지 말이다. 비록 그레이만큼 가진 돈이나 명예가 없어서 데이트에 헬리콥터를 띄울 수는 없을지라도 잠자리에서 나의 여자에게 하늘 위를 나는 ‘황홀감’을 선사해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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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file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 이화여자대학교 보건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성과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와 강의를 해왔다. 내일여성센터 교육팀장 및 성폭력상담소 상담부장, 경향신문 미디어칸성문화센터 소장, 제주 ‘건강과 성 박물관’ 초대 관장, 대한성학회 사무총장과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행복한성문화센터 소장이며, 세종대학교 겸임교수, 한국양성평등진흥원 초빙교수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니 몸, 네 맘 얼마나 아니?>, <똑똑하게 사랑하고 행복하게 섹스하라> 등이 있다.
댓글
  • 남자가 읽을 이유는 없겠다 생각했는데 한번 읽어볼까 싶네요. ㅎㅎ
  • 이 칼럼은 어디에 실렸던 글인가요?~
    • 여기 첨 실린 원고이지요^^
  • 멈춰야하는 선이 있다는 게, 들어서는 것을 망설이게 하는 요소인 듯하네요.
  • 배워야 한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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