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해야 하고, 은밀해선 안 되는 방
산부인과 의사는 두 가지 진료 철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환자에게 옛날 어떤 병이 있었는지,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와 성경험, 출산력 등을 물을 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꼭 주변을 물리고 환자와 단 둘이서 문진(問診)해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는 몸을 만져야 하는 진찰은 의사가 환자와 단 둘이 있을 때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남자 산부인과 의사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진찰 중에 생길 수 있는 오해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보조자가 옆에 있을 때 진찰해야 하며 없으면 “마네킹이라도 세워 놓아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환자비밀의 준수는 모든 진료 과가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산부인과에서는 천하없어도 꼭 지켜져야 합니다. 산부인과 의사는 눈과 귀는 밝아야 하지만 입은 엄청나게 무거워야 합니다. 특히 여성의 과거 성(性)적 경험이나 임신 중절 수술과 같은 병력은 절대적입니다.
어떤 환자든지 일단 병원에 오면 의사는 외래에서 병력을 듣고 차트에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차트에는 의사들만이 알 수 있는 암호가 있습니다. 즉 이 암호를 보면 이 환자는 과거에 몇 번의 임신을 했으며, 몇 명의 아이를 낳았고, 임신 중절은 몇 번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환자 진료에 있어서 필수이며 이를 근거로 해서 치료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한편, 대학병원에서는 의대생들이 임상 실습을 하게 마련입니다. 학생들은 선배 의사들이 이미 작성해 놓은 병력채취(history taking) 차트를 살펴보고는, 자신도 환자한테 가서 병력을 묻는 과정을 실습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끔 ‘대형사고’가 터집니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학생이 옆에 남편이 있는 상황에서 병력을 물어 난처한 일이 생기는 겁니다.
차트에는 결혼 전 임신 중절 수술기록이 있는데, 옆에 남편이 앉아 있다면 환자는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기 마련이지요. 이때 고지식한 학생이 “아까는 있다고 해놓고 지금은 왜 없다고 하느냐”고 따지기 시작하면 대형 사고가 터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산부인과에 임상실습을 나온 학생들에게 제일 먼저 교육시키는 일은 환자의 비밀 유지, 그리고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문제가 발생되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자칫하면 한 가정을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진료 중에서도 난감하면서 꼭 환자의 비밀을 지켜주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이 일어납니다. 제가 전북대병원에서 전공의 1년차 시절인 1984년 때입니다. 대학 1학년의 앳된 여학생이 응급실에 실려 왔습니다. 혈압은 떨어지고 얼굴은 창백하며 배속에 상당량의 혈액이 고이고 있는 응급상태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소변검사로 임신 여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기 전이었습니다. 분명 임상소견으로는 자궁 외 임신(나팔관임신)으로 나팔관이 파열돼 뱃속에 혈액이 고이고 있는데, 이 여학생은 성 경험은 전혀 없었다고 잡아뗐습니다.
주변에 있던 부모와 오빠를 다 물리고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꼭 그 비밀은 지켜 주겠다고 말했더니, 여학생은 얼마 전에 딱 한번 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다고 실토했습니다. 물론 병원 차트에는 ‘나팔관 임신에 의한 복강 내 출혈’이라고 사실대로 기록했지만 보호자에게는 ‘난소에 있는 물혹이 터져서 피가 고인 것’이라고 설명하고는 응급수술을 통해 생명도 구하고 그 어린 여학생의 비밀도 지켰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사 사연도 많고, 비밀도 많은 인생 이야기가 가득한 곳이 아마도 산부인과가 아닐까 합니다. 앞으로 속삭닷컴을 통해서 제가 산부인과 의사로서 그동안 겪었던 수많은 일들을 환자의 비밀이 전혀 드러나지 않도록 글로 옮겨야 한다니, 어깨가, 아니 입이 무거워집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