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서 섹스할까, 섹스해서 사랑할까


우리의 삶과 인간관계에서 가장 듣고 싶은 소중한 말은 아마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토록 받고 싶고 듣고도 싶은 사랑의 의미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기에 헤어지고, 증오하고, 심지어는 살인한다.

 

사랑, 무엇일까? 사랑의 본질은 뭘까?

 

우리말 사전에 보면 ‘사랑’은 ‘생각하다’에 어원을 둔 말로,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의 뜻을 가진다. 한편 영어사전에는 ‘열정’, ‘애정’, ‘호감’, ‘배려함’을 통합적으로 사랑으로 정의한다. 즉 우리말 사전에는 타인을 배려하는 인간관계를 강조하는 반면, 서구에서는 열정과 애정과 친밀감을 강조하고 있다. 문화에 따라 사랑의 의미도 다르게 강조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의미는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친밀감과 애정을 강조한다. 어떤 이는 상대에 대한 충성심과 책임감을 강조한다. 또 어떤 이는 성적이고 육체적인 즐거움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사랑은 긍정적이고 다정하고 서로를 수용하는 관계를 의미하는 쪽으로 귀결된다.

 

그러면 사랑과 성은 어떤 관계일까?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이 말을 달리하면, 남녀의 사랑은 성적 요소와 관계적 요소가 공존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성이나 아니면 관계냐,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남녀의 사이는 건강할 수도, 불안전할 수도 있다.

 

먼저, 성적인 만족을 위해 관계를 이용하거나, 관계를 섹스 추구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 이때는 성적인 만족을 충족하면 관계를 단절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사랑한다”면서 접근하고 “사랑한다”면서 헤어지겠지만 말이다. 이런 관계는 젊은 연잉 사이에 자주 발생하는데, “사랑한다”며 섹스를 하지만, 섹스라는 목적이 이뤄진 뒤에는 관심과 애정이 사라지는 경향이 많다.

 

이런 뜻에서 성매매는 사랑도 아니고 진정한 의미의 성도 아니다. 성매매는 돈을 주고 상대의 육체를 이용해 자위를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관계’와 ‘섹스’는 이렇듯 늘 함께 가야 한다.

관계를 유지하거나 강화하기 위해 성을 활용하면, 성도 즐기고 친밀감도 늘어난다. 처음부터 성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고, 상대를 이해하고 수용하며 정서적 연결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성관계가 맺어질 때 가능하다. 관계라는 맥락에서 성을 즐길 때 인간적 친밀감과 성적 만족이 조화를 이룬다.

 

문제는, 성과 관계에 대한 남녀간의 인식 차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흔히들 남성은 “섹스를 안 하면 사랑도 없다(No sex, no love)”고 하는 반면, 여성은 “사랑이 없으면 섹스도 없다(No love, no sex)”고 강조한다.

 

이 구호를 피상적으로만 보면 마치 남성은 섹스를 밝히고 여성은 애정을 중시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남성은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상대방과 섹스하기를 원하는 과정에서 친밀감을 추구하고, 여성은 남성에게 매력과 친밀감을 느끼는 맥락에서 섹스를 추구한다는 얘기다. 결국 남성이나 여성 모두가 원하는 바는, 상대의 성과 인격을 포함한 전인적인 사랑을 원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남성은 섹스에만 몰입하는 ‘섹스 머신’으로 오해받을 여지가 충분하고, 여성은 본질적으로 성을 초월한 존재이므로 섹스를 추구하는 여성은 ‘이상한’ 여성으로 낙인찍힐 소지가 있는 것이다. 단지 남성은 성적인 매력을 통해 적극적으로 사랑에 접근하고, 여성은 상대와의 안정된 친밀감을 통해 사랑을 추구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성은 관계 안에서 그 관계를 강화하는 소중한 통로일 때 비로소 건강하고 오래 지속되며 성숙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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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file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미국 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임상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심리학과 부교수로 있으며, 한국여성상담센터 이사장, 성신여대 부설 심리건강연구소 청소년 및 가족치교 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부부가 함께 말하기와 듣기>, <부부대화 지도자 매뉴얼>, <핵심대화>, <성피해 심리치료> 등이 있다.
댓글
  • <남성은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상대방과 섹스하기를 원하는 과정에서 친밀감을 추구하고, 여성은 남성에게 매력과 친밀감을 느끼는 맥락에서 섹스를 추구한다는 얘기다. 결국 남성이나 여성 모두가 원하는 바는, 상대의 성과 인격을 포함한 전인적인 사랑을 원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남성은 섹스에만 몰입하는 ‘섹스 머신’으로 오해받을 여지가 충분하고, 여성은 본질적으로 성을 초월한 존재이므로 섹스를 추구하는 여성은 ‘이상한’ 여성으로 낙인찍힐 소지가 있는 것이다. 단지 남성은 성적인 매력을 통해 적극적으로 사랑에 접근하고, 여성은 상대와의 안정된 친밀감을 통해 사랑을 추구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인용한 이 부분이 공감하면서 동의하는 사실이다. 남성은 성만 추구하고 여성은 사랑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성(性)이라는 한자를 뜯어보면 알 수 있다. 즉 성이라는 것도 마음이 생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친밀감을 먼저 추구하는 여성의 성적 접근이 성의 본질에 맞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여자를 "꼬시고" 싶으면 여성적 성적 접근에 충실하면 될 것 같다. 문제는 여성이 예뻐야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남성적 성적 접근이 전제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걸 꼭 남성적 성적 접근이라고 볼 수만도 없는 것이 여성도 잘생긴 남성에 호감을 느끼고 친해지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관계에서 여성이 성적인 요구를 하거나 관심을 표하는 것을 "밝힌다"고 해서는 안되는 게 기본적으로 성은 여자 것이기 때문이다. 출산의 고통에 대한 댓가로 성적 쾌락은 여성이 더 많이 느끼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속된 말로 아기가 질로 나오는 고통보다 재미없으면 이후에 다시 남근을 질로 받아들이겠느냐 말이다. 출산의 고통을 잊을 정도의 쾌락이 있기 때문에 인류가 보존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구니의 계율이 비구의 계율보다 몇 백개가 더 많은데 그 이유도 여성의 음욕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음욕 때문에 인류가 보존되고 있는 것이지만....
    • 비구니의 계율이 비구의 계율보다 몇 백 개가 더 많은지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성의 음욕이 남성보다 크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수긍하기가 어렵네요. 불교의 남녀차별을 비롯한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요?
    • 정확히는 모르지만 비구의 계율이 2~3백 개, 비구니의 계율이 4~5백 개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여성의 음욕이 크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현재도 인도에서 여성의 지위가 열악하지만, 부처님 당시는 더 했고 어쩌면 그런 여성을 보호하기 하기 위해 스스로 조심하도록 계율이 많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교가 남녀를 차별하기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카톨릭에서는 사제는 남자인 신부만 될 수 있고 여성은 수녀밖에 될 수 없는데 비해, 불교에서는
      여성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불교가 훨씬 더 남녀 평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친밀한 관계에서 여성이 성적인 요구를 하거나 관심을 표하는 것을 "밝힌다"고 해서는 안돼>

    출산과 쾌락의 비교나 성관계에 대한 동기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약간 과장된, 이해가 조금 안됩니다만 남성/여성을 떠나서 위의 인용처럼 성에 대한 욕구와 표현에 대해 편견없이 합리적으로 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는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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