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의 화신 헤라

헤라 바르베리니, (원통형 왕관을 쓴 헤라 두상)


대지모신에서 질투의 화신으로 추락

 

 제우스의 정실부인이자 결혼과 가정의 여신 ‘헤라(Hera)’는 로마 신화에선 ‘유노(Juno)’로, 영어로론 ‘주노(Juno)’로 부른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헤어 살롱 ‘준오(Juno)’도 헤라의 영어식 이름인 ‘주노’를 친근한 우리식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과거 어려운 시절, 우리의 어머니들이 온 식구들의 머리를 도맡아 깎아준 적이 있었으니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이름이다.

 

 ‘헤라’라는 말은 원래 ‘영웅’을 뜻하는 그리스어 ‘헤로스(Heros)’의 여성형으로 ‘여주인’ 혹은 ‘여걸’이란 뜻을 지닌다. 어원이 말해주듯 헤라는 원래 그리스 반도의 원주민들 사이에서 위대한 대지모신(大地母神)이었다. 하지만 위풍당당했던 여신은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이방의 남신들이 그리스 반도를 점령하면서 초라한 질투의 화신으로 추락하고 만다.

 

 헤라 여신이 한때 위대한 대지모신이었다는 증거는 아주 많다. 우선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녀에게 최초로 벽과 지붕으로 둘러싸인 신전을 봉헌했다. 이 신전은 바로 기원전 800년경에 세워진 사모스(Samos) 섬의 헤라신전이다.

이 신전은 기원전 570~560년경에 사모스의 건축가이자 조각가였던 로이코스(Rhoikos)에 의해 새로운 신전으로 개축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540~530년경 지진으로 파괴되자 이번에는 폴리크라테스(Polykrates)라는 건축가가 신전을 신축했는데, 그 규모가 그리스 전체에서 가장 컸다고 한다. 헤라가 평범한 여신이었다면 어떻게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녀의 신전을 최초로 그것도 최대 규모로 지었겠는가?

 

 사모스 섬의 신화에 의하면 헤라 여신은 리고스(Lygos)라는 순결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또한 그녀는 제우스와 1년에 한 번 사모스의 헤라신전의 제단 옆에 있던 순결나무 밑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그 후 그녀는 임브라소스(Imbrasos)라는 샘물에 가 목욕을 함으로써 처녀성을 되찾았다.

헤라 신앙이 강했던 아르고스(Argos)에서는 여신이 목욕을 했던 샘의 이름이 임브라소스에서 카나토스(Kanathos)로 바뀐다.

 이렇게 헤라 여신이 처녀성을 되찾았다는 것은 그녀가 원래 결혼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대지모신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고대의 대지모신은 마음에 드는 남신이나 남자들과 사랑을 나눈 뒤 헤라처럼 세례의식을 통해 처녀성을 되찾곤 했기 때문이다.


헤라 캄파나, ad 2 세기 헬레니즘 시대 진품의 로마시대 복제품


헤라, bc 470년경의 그리스 도기 그림

 

 헤라 여신은 가끔 원통형 왕관(Daiadem)을 쓰고 한 손에 왕 홀을 든 채 위풍당당하고 근엄한 모습으로 옥좌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중 원통형 왕관은 레아(Rhea)나 키벨레(Kybele) 등 소아시아 지방의 대지모신들이 즐겨 쓰던 모자다. 왕 홀도 다른 여신들은 들고 있지 않은 권위의 상징으로, 헤라가 한때는 모든 신들을 지배하던 추상같은 대지모신이었음을 암시해준다.

 아르고스의 헤라 신전에 안치되어 있던 상아와 황금으로 된 폴리클레이토스(Polykleitos)의 헤라 좌상을 보라. 원통형 왕관을 쓰고 한 손에는 석류를, 다른 한 손에는 뻐꾸기가 앉아있는 왕 홀을 든 채 우미(優美)의 여신 카리테스(Charites) 세 자매와 계절의 여신 호라이(Horai) 세 자매가 부조로 새겨진 옥좌에 앉아있었다고 한다.

또한 사모스 박물관에 전시된 헤라신전에서 출토된 봉헌물의 출처는 아르메니아, 바빌론, 이란, 아시리아, 이집트 등으로 아주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헤라 여신은 사모스뿐 아니라 그 주변 지역에서 대지모신으로서 대단한 명성을 누렸고 참배객들도 아주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헤라 여신은 본토에서는 주로 아르고스에서 숭배를 받아 ‘아르고스의’라는 뜻의 아르게이아(Ἀργεία)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미케네, 스파르타, 코린토스, 티린스, 페라코라 등에도 그녀의 신전이 있었다.

 

 특히 올림피아에 있었던 헤라 신전은 제우스 신전보다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시칠리아의 그리스 식민지였던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의 파이스툼(Paestum)에는 헤라 신전이 두 개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그동안 포세이돈 신전으로 전해내려 오다가 1950년대에 비로소 헤라 신전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헤라 여신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올림피아에서는 제우스신전보다 더 먼저 건축되었고 시칠리아에는 2개나 지었을까? 또 헤라의 많은 별명 중에는 ‘여왕’이라는 뜻의 ‘바실레이아(Βασίλεια)’도 있는데, 이것은 헤라가 한 때 그리스 원주민을 호령하던 신들의 여왕, 즉 대지모신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제우스와 헤라


 하지만 호메로스(Homeros)는 자신의 작품에서 자주 제우스가 신들의 왕이고 헤라는 그의 아내임을 강조하며 여신을 질투의 화신으로 묘사하는 데만 열을 올린다. 그것은 바로 대지모신으로서의 헤라의 흔적을 지우고 그녀에 대한 숭배를 차단하려는 의도이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는 수많은 에피소드를 통해 헤라가 한눈을 파는 남편 때문에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애를 태웠는지를 부각시켜 보여준다. 그 중 남편의 외도 현장을 덮칠 기회를 앗아간 숲의 요정 에코(Echo)에게 헤라가 어떻게 복수했는지 살펴보자.

 

헤라의 분노로 메아리가 된 요정 에코

 

 에코는 숲과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흠모하며 울창한 숲 속에서 자연과 함께 팔팔하게 뛰노는 아리따운 아가씨였다. 그런데 그녀는 소문난 수다쟁이기도 했다. 에코는 한번 입을 열었다 하면 상대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폭포처럼 말을 쏟아 부어 누구든 혼을 빼어놓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제우스가 요정들을 희롱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헤라가 은밀히 현장을 추적하여 찾아가던 중 에코를 만났다. 그런데 길목을 막고 있던 에코는 갑자기 헤라에게 특유의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러자 헤라는 에코의 수다에 넋을 잃고 말았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에코


 에코의 수다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문득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상황은 이미 끝나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헤라는 에코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 수다꾼아, 너 때문에 남편을 혼내줄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 잘난 혓바닥에 저주를 내려주마. 이제부터 너는 남이 말을 꺼내기 전엔 절대 혀를 놀릴 수 없고 말대답만 할 수 있으리라!”

 헤라의 저주로 상대가 말을 걸어오기 전에는 먼저 입을 열 수 없게 된 에코는 어느 날 숲 속으로 사냥을 온 눈부시게 아름다운 청년 나르키소스(Narkissos)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에게로 당장 달려가 사랑을 속삭이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에코는 헤라의 저주로 나르키소스의 곁을 배회하며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에코와 나르키소스


 바로 그때 나르키소스가 동료들을 잃어버렸는지 큰 소리로 “근처에 누구 없나?”라고 외쳤다. 그러자 에코가 말을 받아 “없나?”라고 대꾸했다. 나르키소스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나르키소스가 다시 “있거든 이리로 나와!” 하니까, 에코도 “나와!” 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도 나오질 않자 나르키소스는 다시 더 큰 소리로 “다들 나와 함께 가자!”라고 외쳤다. 그제야 에코는 “가자!”라고 화답하며 나르키소스에게 달려가 목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애정공세에 나르키소스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서면서 “놓아라. 너 같은 것에게 안기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에코는 “죽어버리겠다!”라고 외치며 물러났다.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매몰차게 발길을 돌려 사라지자 에코는 부끄러움에 낯을 붉히며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때부터 에코는 눈에 띄지 않는 동굴이나 계곡에서만 살았으며 실연의 아픔 때문에 날로 여위어 가다가 마침내 육신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메아리’로 남게 되었다.

 

한 송이 수선화로 피어난 나르키소스

 

 에코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나르키소스는 강의 신 케피소스(Kephisos)와 물의 요정 레이리오페(Leiriope)의 아들로서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레이리오페는 나르키소스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대 최고의 예언가 테이레시아스를 찾아가 아들이 오래 살 수 있을지 물었다. 테이레시아스는 “나르키소스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 않아야 장수할 것”이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날 이후 나르키소스의 부모는 집안의 거울을 비롯하여 얼굴이 비칠 만한 것들은 아예 아이 근처에 얼씬도 못하도록 했다. 그 덕택에 제 모습을 보지 못한 나르키소스는 무사히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랐다. 나르키소스의 얼굴은 갈수록 아름다움을 더해 보는 이들의 마음을 훔쳤다. 숱한 요정들도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쌀쌀맞게 뿌리치곤 한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나르키소스에게 구애했다가 거절당한 요정들이 나르키소스 때문에 에코도 메아리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곤 분노했다. 어느 날 숲 속 같은 장소에 모여 나르키소스를 실컷 성토한 요정들은 신들에게 “나르키소스에게도 짝사랑의 아픔이 뭔지를 깨닫게 해달라”며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했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Nemesis)가 요정들의 기도에 응답했다. 어느 더운 여름날 나르키소스는 홀로 사냥에 나섰다가 목이 말라 깊은 산중의 맑은 샘물을 찾았다. 그리곤 물을 마시려고 몸을 숙였다. 갑자기 수면 위에서 웬 아리따운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하고 넋을 잃었다! 그녀는 금발의 고수머리, 맑고 커다란 눈동자, 갸름한 장밋빛 볼, 오뚝한 코, 타는 듯한 붉은 입술, 그리고 사슴처럼 가늘고 긴 목이 완벽한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었다.

 

 단숨에 샘물에 비친 아리따운 요정과 사랑에 빠져버린 나르키소스는 샘가를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수면에 비친 요정만 바라보았다. 그리곤 자신을 짝사랑하다 육신이 사라져 간 에코처럼 상사병의 아픔으로 나날이 야위어가다 결국 샘물가에서 흔적도 없이 말라죽었다. 얼마 후 그 자리에 아름다운 노란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그 꽃이 바로 나르키소스의 이름을 딴 수선화(narcissus)다.


나르키소스


에코와 나르키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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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마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연세대에서 ‘릴케의 <말테의 수기>와 대도시 문제’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신화, 세상에 답하다』, 『신화, 인간을 말하다』, 『신들의 전쟁』이 있다. 현재 여러 대학과 기업체, 지역 도서관, 병원 등에서 신화를 소재로 인문학 특강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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